
이 작품은 실제 철강시장 자료를 모티프로 창작한 픽션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일부 기업·사건은 허구이며, 실제 기업·단체·사건과 관련이 없다. 실제 기업명은 공개된 시장정보와 가격정책을 설명하기 위한 범위에서만 사용했다.
06:20, 부두의 숫자
해가 막 수평선 위로 올라왔을 때 물류팀장 최 과장은 부두 쪽에서 올라오는 무전기를 귀에 댔다. 열연 코일을 실은 차량이 한 대씩 계근대를 통과했고, 야드 안쪽에는 전날 밤부터 도착한 수입 코일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9월 중하순 중국·대만·동남아산 열연 입항 물량이 15만 톤을 넘어섰다는 시장 소식은 숫자로 들을 때보다 눈앞의 코일 더미로 볼 때 훨씬 무거웠다.
“오늘 안에 들어오는 물량만 보면 창고가 꽉 찬 것처럼 보입니다.” 최 과장이 말했다.
구매팀의 서 부장은 코일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짚어보며 대답했다. “창고가 찬 것과 팔 물건이 많은 건 다르지. 원산지, 규격, 납기, 결제조건이 다 따로야.”
영업팀장 문 차장이 휴대전화 화면을 내밀었다. “그래도 고객들은 수입재가 많이 들어왔다는 얘기부터 합니다. 국내산 가격을 지키기 어려워졌다고요.”
“그 말이 틀린 건 아니지.” 서 부장이 말했다. “그런데 10월부터 국내 판재류 공급가격을 톤당 4만 원 올리겠다는 발표도 나왔어. 지금은 물건이 많아 보이지만 다음 달 원가표는 다른 얘기를 하고 있어.”
아침 회의가 열리기도 전인데 세 사람은 이미 같은 문제를 다른 방향에서 보고 있었다. 물류는 공간을 걱정했고, 영업은 오늘의 주문을 걱정했고, 구매는 내일의 원가를 걱정했다. 같은 코일을 놓고도 부서마다 무게가 달랐다.
10:05, 세 개의 기준선
회의실 벽에는 아무 숫자도 적히지 않았다. 서 부장은 숫자를 칠판에 적는 대신 인쇄된 시장표를 책상 가운데 놓았다. 9월 넷째 주 수도권 1차 유통 기준에서 열연강판은 국내산이 톤당 90만~92만 원, 수입산이 87만~89만 원 수준이었다. 둘 다 전주와 비교해 보합이었고 가격 차는 대체로 3만 원 안팎이었다. 중국 천진항 열연코일 수출가격은 톤당 496~498달러 FOB로 중심가격이 전주보다 4달러 올랐다.
재무팀 박 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가격 차가 3만 원이면 고객은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수입산으로 바꾸면 된다고요.”
문 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장도 그렇게 말합니다. 특히 납기가 여유 있는 곳은 더 그렇습니다.”
서 부장이 손가락으로 표의 수입산 가격을 두드렸다. “그런데 수입재도 내려오기만 하는 건 아니야. 천진항 가격이 반등했고, 국내 공급가는 다음 달 인상 예고가 있어. 지금 싸 보인다고 오늘 전부 밀어내면 다음 달에 다시 채울 때 원가가 달라질 수 있어.”
박 부장이 물었다. “그렇다고 재고를 안고 가면 금융비용은 누가 책임집니까? 매출채권 회전도 느려졌습니다.”
“그래서 전부 들고 가자는 게 아닙니다.” 서 부장이 답했다. “확정 주문에 맞는 규격과 원산지는 바로 돌리고, 그냥 가격만 보고 들어온 물량은 더 보수적으로 보자는 거죠.”
문 차장이 반문했다. “그러면 오늘 낮에 견적 기다리는 고객은요? 수입재를 더 낮게 써 달라고 이미 두 번 연락 왔습니다.”
잠시 말이 끊겼다. 누구도 ‘오를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었다. 공급가 인상은 발표됐지만 유통시장이 따라갈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반대로 수입재가 많다고 해서 계속 내려갈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실제 시장은 두 방향의 힘이 동시에 걸린 철판처럼 휘어 있었다.
11시가 조금 넘어 가공팀 이 반장이 회의실 문을 두드렸다. “오후 절단 계획을 확정해야 합니다. 어느 코일부터 잡습니까?”
문 차장이 즉시 말했다. “오늘 출하 확정된 고객 물량부터요. 수입재 견적 기다리는 건 잠깐 보류해 주세요.”
이 반장이 서 부장을 봤다. “가격 때문에 멈추는 겁니까, 품질 승인 때문에 멈추는 겁니까?”
서 부장이 답했다. “둘 다 아닙니다. 지금은 물건을 자르는 순서가 곧 가격 결정을 뜻하니까요. 한번 절단하면 다른 고객에게 돌리기 어려운 규격부터 생깁니다.”
가공팀은 현장의 시간을 말했다. 영업이 생각하는 ‘한 번 더 협상할 시간’은 절단 라인에서는 작업 순서를 바꾸는 비용이었고, 구매가 생각하는 ‘조금 더 지켜볼 시간’은 물류팀에는 야드 공간을 차지하는 재고였다.
점심 무렵 생산지원 담당 오 실장이 뒤늦게 회의에 들어왔다. 그는 포스코의 닷새 부분파업 때도 열연 품귀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대목을 짚었다. 파업 전에 필요한 물량을 생산했고 재고도 충분했던 탓에 유통시장 공급에는 큰 차질이 없었다는 시장 평가였다.
“공급이 막혀서 가격이 오르는 장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오 실장이 말했다.
서 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러니 4만 원 인상 공문만 보고 재고를 늘리면 안 됩니다.”
문 차장이 물었다. “그럼 반대로 15만 톤 입항만 보고 전부 싸게 팔아도 안 되고요?”
“그렇죠. 지금 시장은 한쪽 숫자만 보면 반드시 틀립니다.”
박 부장은 매출채권 현황표를 덮었다. “결국 가격이 아니라 시간표를 나눠야겠네요. 오늘 현금이 되는 주문, 다음 달 납기 주문, 승인 기다리는 재고. 그 셋을 한 가격으로 묶으면 손익이 안 보입니다.”
그 말 뒤에 회의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시장이 오르느냐 내리느냐를 맞히는 문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의 원가를 같은 견적서에 섞지 않는 문제로 바뀐 것이다.
14:40, 주문보다 먼저 정해야 할 것
오후 들어 첫 번째 고객이 다시 전화를 걸었다. 문 차장은 스피커폰을 켜지 않았다. 대신 창가에 서서 짧게 통화했다.
“수입산 기준으로 더 내려갈 수 없습니까?” 상대방이 물었다.
문 차장이 말했다. “오늘 기준으로는 제시한 범위 안에서 보겠습니다. 대신 납기와 규격을 확정해 주시면 출하 순서를 먼저 잡겠습니다.”
“다른 데는 더 싸게 얘기합니다.”
“가격 한 줄만 비교하시면 그쪽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다음 달 납기까지 같은 조건인지는 확인해 보셔야 합니다.”
전화를 끊은 뒤 문 차장은 회의실로 돌아왔다. “주문을 놓칠 수도 있습니다.”
박 부장이 말했다. “그게 이번 결정의 비용이겠죠.”
서 부장은 한동안 견적서를 보다가 펜으로 한 줄을 지웠다. 그 줄에는 ‘수입재 일괄 할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대신 고객별 납기와 규격, 원산지 승인 여부를 나눠 적었다.
“오늘부터 한 가지는 바꿉시다.” 서 부장이 말했다. “국내산과 수입산을 평균 가격으로 섞어 견적하지 맙시다. 확정 주문은 현재 시장 범위에서 처리하고, 10월 인도분은 원산지와 납기를 분리해 다시 계산합니다. 재고를 빼기 위해 전체 가격을 먼저 낮추지는 맙시다.”
문 차장이 물었다. “그렇게 하면 단기 매출은 줄 수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대신 지금 3만 원 차이를 잡겠다고 다음 달 4만 원 변수를 공짜로 떠안지는 말자는 겁니다.”
박 부장이 덧붙였다. “재고도 같은 기준으로 나누죠. 확정 주문용, 승인 대기용, 가격 판단 대기용. 그래야 자금이 어디에 묶였는지 보입니다.”
최 과장은 야드 배치표를 접으며 말했다. “그러면 오늘 들어온 코일도 자리가 정해지겠네요. 지금은 물건보다 이름표가 더 필요합니다.”
해가 기울 무렵 부두의 코일 수는 아침보다 많아져 있었다. 하지만 회사가 결정해야 할 것은 코일의 숫자가 아니었다. 어느 재고를 오늘 팔고, 어느 재고를 내일까지 기다릴 것인지였다. 국내 공급가 인상과 수입재 유입 확대가 동시에 나타나는 시장에서는 싸게 사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었다. 같은 가격표를 언제까지 믿을 것인지 정하는 일이었다.
문 차장은 마지막 견적서를 보내기 전, 오전에 적어 두었던 문장을 다시 읽었다. ‘수입재가 많다.’ 그 문장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거래가 완성되지 않았다. 그는 그 아래에 한 줄을 덧붙였다. ‘납기와 원가가 바뀌는 시점은 서로 다르다.’ 그리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그날의 가격
| 품목 | 가격 | 주간 변동 |
|---|---|---|
| 열연강판 국내산(SS275 3mm SHEET, 수도권 1차) | 톤당 90만~92만 원 | 보합 |
| 열연강판 수입산(수도권 1차) | 톤당 87만~89만 원 | 보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