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22일 (목)
누적 방문자 331,635
일일 방문자 4,245
~

강철의 계절 65화 — 구매담당자는 최저가 칸을 비워 뒀다

철골 가공장과 건설현장을 배경으로 H형강의 물성을 목탄 데생으로 표현한 채널 중립형 산업현장 그림
이 작품은 실제 철강시장 자료를 모티프로 창작한 픽션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일부 기업·사건은 허구이며, 실제 기업·단체·사건과 관련이 없다. 실제 기업명은 공개된 시장정보와 가격정책을 설명하기 위한 범위에서만 사용했다.

현장 사무실의 벽에 걸린 철골 배치도에서 붉은 펜으로 표시된 구간 하나가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거기에 들어갈 H형강의 재질과 규격, 제작 순서까지는 정해졌지만 구매처만 빈칸이었다. 조달담당자 서윤하는 그 빈칸을 유난히 오래 바라봤다. 오늘 낮까지 계약서를 돌리겠다고 약속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화면에는 서로 다른 유통가격이 나란히 있었다. 10월 둘째 주 국산 중소형 H형강 시세는 톤당 118만~119만원이었다. 베트남산은 112만원, 일본산은 104만원 수준으로 조사됐다. 가격만 놓고 보면 결론은 간단했다. 그런데 윤하는 가장 싼 항목에 커서를 옮겨놓고도 결재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값이 다른 것과 같은 물건이라는 것은 전혀 다른 명제였다.

“비교표는 다 만들었습니까?” 공무담당 한태진이 물었다. “표는 만들었는데, 판단할 칸이 하나 부족해요.” “그 칸이 뭡니까?” “우리 도면에서 요구한 물건이 정말 같은 날짜에 같은 조건으로 들어오는지요.” 태진은 값표를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위에서는 왜 싼 걸 안 사느냐고 묻겠군요.” “그 질문에 답하려고 오늘 현장으로 가는 겁니다.”

표보다 먼저 확인할 것

현장에는 겨울바람이 아직 들지 않았는데도 철골을 쌓아둔 구역은 서늘했다. 절단을 기다리는 형강에는 굵은 그늘이 생겼고, 작업자들은 지게차가 지나갈 때마다 몸을 비켰다. 윤하는 골조공사 반장 배은성에게 도면을 펼쳐 보였다. 은성은 가격표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대신 절단선 근처의 표기와 접합부 상세도를 번갈아 확인했다.

“이걸 다른 공급처로 바꾸면 안 됩니까?” 윤하가 물었다. “못 바꾼다는 뜻은 아니에요.” 은성이 답했다. “다만 자재승인에 적힌 항목과 실제 들어온 부재가 맞아야 하고, 가공장에서 쓰는 도면도 같이 바뀌어야 합니다. 두 가지만 뒤늦게 맞추면 된다고 생각하면 현장은 멈춥니다.” “가격 차이는 꽤 납니다.” “가격표는 오늘 한 번만 보지만, 잘못 들어온 빔은 공정 내내 보게 됩니다.”

은성의 말은 비싼 국산재를 무조건 쓰자는 주장도, 수입재를 믿지 못하겠다는 판단도 아니었다. 실제 성적서와 규격, 보유 재고, 절단 계획이 일치한다면 어느 쪽이든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는 윤하에게 출하 전에 확인해야 할 목록을 돌려주었다. 서류에 적힌 용도와 규격이 자재와 맞는가. 다른 부재와 조립했을 때 가공 치수를 다시 잡아야 하는가. 변경 승인을 누가 책임지는가. 가격표에는 없던 질문들이 줄지어 늘었다.

“가격을 낮추는 건 제가 할 일입니다.” 윤하가 말했다. “현장을 늦추지 않는 건 제가 할 일이고요.” 은성이 웃지 않은 채 대답했다. 둘은 맞서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같은 손실을 다른 쪽에서 보고 있었다. 하나는 계약금액의 손실을, 다른 하나는 재가공과 작업 중단의 손실을 계산하고 있었다.

전화기 너머의 낮은 가격

유통업체 영업담당 민기준은 오전부터 여러 통의 전화를 받았다. 시장이 비수기처럼 조용한데도 가격 문의만은 늘었다. 제강사들이 공급가격을 지키겠다는 태도를 보였지만 유통시세는 다시 낮아지는 중이었다. 실수요 발주가 약한 탓에 가격을 더 낮춰도 판매량이 늘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기준은 거래처마다 제시하는 조건이 달랐고, 같은 숫자라도 출고 시점과 검수 범위에 따라 손에 남는 돈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국산은 이 가격 아래로 어렵습니다.” 기준이 말했다. 윤하는 묻지 않았던 질문부터 던졌다. “그보다 먼저 물어볼게요. 지금 출고 가능한 규격이 정확히 뭔가요?” “재고표에는 있습니다.” “재고표 말고, 실제 출고 승인까지 끝난 물건이요.” 전화기 너머에서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기준이 말했다. “확정 가능한 것과 확인이 더 필요한 것을 따로 보내겠습니다.”

그는 수입재를 먼저 제안할 수도 있었다. 10월 둘째 주 조사에 나타난 일본산 H형강 유통가격은 톤당 104만원, 베트남산은 112만원 수준이었다. 국산 중소형 시세인 118만~119만원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이 숫자는 서로 다른 업체의 개별 계약서가 아니었다. 시장에서 관찰된 거래 기준선일 뿐이며, 규격별 가용량과 검수 조건까지 보증하는 가격도 아니었다. 기준은 그 차이를 설명할 때마다 거래가 늦어지는 것이 싫었다. 설명을 건너뛰면 나중에 더 큰 시간을 잃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싼 물건부터 넣으면 안 됩니까?” 기준의 후배가 물었다. “물건만 싸게 넣을 수 있으면 그렇게 하지.” 기준이 답했다. “상대방이 어떤 승인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는데 단가부터 확정하면 나중엔 우리도 못 지킬 약속을 하게 돼.” “그러면 매출이 다른 데로 가요.” “그래도 빈 약속으로 매출을 만드는 건 아닙니다.”

기준은 출하 가능 여부, 서류 제출 가능 시점, 규격별 재고를 분리한 확인표를 만들었다. 수입 H형강을 낮춰 보이거나 국산재의 장점을 과장하지 않았다. 이번 달 초 제강사의 소형 규격 판매가격이 톤당 123만원, 대형 규격은 136만원으로 공지됐어도 시중 거래는 그보다 낮은 수준이라는 점을 감추지 않았다. 그의 계산에서는 정가를 외치는 일이 영업이 아니었다. 확인 가능한 조건을 하나씩 쌓아 거래가 실제로 움직이게 만드는 일이 영업이었다.

가공장의 빈 작업대

오후에 들른 가공장에서는 절단기보다 도면이 먼저 멈춰 있었다. 가공업체 생산관리자 조명재는 절단 순서를 바꾸는 문제를 두고 골조공사 반장과 통화하고 있었다. 작업대 위에는 형강 단면을 그린 종이가 놓여 있었고, 발주처의 승인 도장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도장이 찍히지 않은 자재를 먼저 가공하면 나중에 치수와 이음부가 바뀌었을 때 어느 쪽이 손실을 떠안아야 하는지 다툼이 생길 수 있었다.

ADVERTISEMENT

“지금 가격이 더 내려간다는데 기다리는 게 이익 아닙니까?” 윤하가 물었다. 명재는 절단기의 전원을 내리며 말했다. “그건 가공장에 자재가 도착한 뒤에도 가격표만 움직인다는 가정이죠.” “그러면 지금 바로 사라는 얘긴가요?” “아니요. 승인부터 끝내 달라는 얘기예요. 결정을 미루는 건 선택이지만, 그 선택을 생산계획에 공짜로 얹을 수는 없어요.”

윤하는 잠깐 자존심이 상했다. 그동안 자신은 현장에 시간을 벌어주는 구매담당자라고 생각했다. 낮은 시세를 기다려 원가를 절약하면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가공장에서 보는 시간표는 달랐다. 형강 한 품목이 늦게 확정되면 다른 부재를 먼저 만들 수도 있지만, 도면 변경이 섞이면 앞서 가공한 물량도 다시 확인해야 했다. 가격이 떨어질 때마다 구매 결정을 미루는 전략에는 남의 시간을 쓰는 비용이 숨어 있었다.

명재는 말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우리도 싸게 사고 싶은 마음은 똑같습니다. 다만 이번에 무엇을 사지 않을지 먼저 정해야 해요.” “사지 않을 물건이요?” “승인 없이 들어올 물건, 치수 확인이 안 된 물건, 오늘 가격만 맞고 출하 조건이 없는 물건. 그걸 뺀 뒤에야 진짜 비교표가 나옵니다.” 윤하는 메모장에 그 말을 적었다. 가장 낮은 숫자를 찾는 일보다 비교할 수 없는 숫자를 지우는 일이 먼저였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윤하는 재무담당 강수민에게 전화했다. 수민은 매입채무와 공사대금 회수 일정에 더 민감한 사람이었다. “지금 계약을 미루면 현금은 남지만, 가공 순서가 밀릴 수 있대요.” “그럼 당장 결제하면 끝나는 겁니까?” “그렇지도 않아요. 승인과 출하가 확인돼야 합니다.” “좋아요. 결제부터가 아니라 확인된 물건에 한해 결제를 묶읍시다. 나머지 금액은 승인 조건을 따로 적고요.”

“회사 돈을 묶지 말자는 뜻이죠?” 윤하가 되물었다. “아니요. 회사가 지킬 수 없는 약속에 돈을 먼저 묶지 말자는 뜻이에요.” 수민의 대답은 가공장의 명재가 했던 말과 닮아 있었다. 돈과 도면, 재고와 운송은 다른 장부에 적혀 있었지만 끝내 같은 계약서에서 만났다. 윤하는 그제야 서류의 빈칸이 왜 무거웠는지 알 것 같았다.

지워진 것은 가격이 아니었다

해가 기울 무렵 윤하는 회의실이 아니라 현장 자재검수 공간으로 사람들을 모았다. 은성은 승인조건을 다시 읽었고, 명재는 가공 가능한 순서를 보여줬다. 기준은 출하확정 물량과 확인이 필요한 물량을 분리해 설명했다. 수민은 결제 조건에 붙여야 할 문장을 표시했다. 모두가 원하던 단일 최저가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대신 어떤 품목을 어떤 조건으로 책임질 수 있는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면 가장 싼 제안을 버리자는 건가요?” 한태진이 물었다. “버리자는 게 아니라 비교를 잠깐 멈추자는 겁니다.” 윤하가 말했다. “승인과 납품 가능한 조건으로 확인되면 수입재도 검토합니다. 확정이 안 된 부분은 최저가라고 이름 붙일 수 없어요.” 기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당장 받을 수 있는 주문은 작아질지 몰라도, 적어도 약속한 물건을 보내지 못해 다시 전화를 돌릴 위험은 줄어들었다.

윤하는 구매안의 첫 칸에 ‘단가’ 대신 ‘승인된 규격과 출하 가능 여부’를 놓았다. 가격 비교는 그다음 칸으로 옮겼다. 출하 확정이 가능한 항목에는 계약을 진행하되, 확인이 남은 항목은 조건부로 분리하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모두가 원하는 물량을 한 번에 확보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확정하지 않은 것을 확정했다고 쓰지 않기로 했다는 점만큼은 분명했다. 그녀는 전송 버튼을 누르기 전에 다시 한번 도면을 확인했다.

그날의 선택은 가장 싼 H형강을 거부한 결정이 아니었다. 아무도 책임질 수 없는 최저가를 계약서에서 지운 결정이었다. 거래가격이 일주일 새 내려가도, 제강사의 인상 공지가 남아 있어도, 가공장에서는 마지막 절단선이 맞아야 일이 끝났다. 수요가 줄어든 시장에서 업체들은 값부터 낮추라는 압박을 받았다. 윤하는 그날 가격을 더 낮추지 못했다. 대신 싸게 사려다 비싸게 되돌리는 일을 한 번 줄일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문을 닫았다.

밤이 되자 철골 배치도의 붉은 선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옆에는 누가 언제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지가 적힌 작은 메모가 붙었다. 은성은 그 종이를 가리키며 웃었다. “이제야 내일 작업이 보이네요.” 윤하도 웃었다. 오래 지워지지 않던 칸이 채워진 것은 단가가 아니라 책임의 순서였기 때문이다.

그날의 가격

가격은 원자료의 2026년 10월 둘째 주 기준이며, 실계약 조건이나 개별 규격·납기를 동일하게 비교한 금액이 아니다.

품목가격주간 변동
국산 중소형 H형강 유통시세118만~119만원/톤 (약 $884~892/톤)전주 대비 약 2만원 하락
베트남산 H형강 유통시세112만원/톤 (약 $839/톤)전주 대비 보합
일본산 H형강 유통시세104만원/톤 (약 $779/톤)전주 대비 보합
현대제철 소형 H형강 판매 공지가123만원/톤 (약 $922/톤)10월 1일 공지, 주간 변동 별도 미제시
현대제철 대형 H형강 판매 공지가136만원/톤 (약 $1,019/톤)10월 1일 공지, 주간 변동 별도 미제시

자료: K스틸_2026-10-17 주간동향모음.docx 내 10월 둘째 주 H형강 시장자료. 달러 환산은 2026년 10월 16일 USD/KRW 1,334.61원(Investing.com 일간 종가)을 적용해 반올림한 참고치다. 시장 유통시세·제강사 공지가·개별 성약가격의 의미는 서로 다르다. 환율 원문

ADVERTISEMENT
RECOMMENDED CONTENT
기사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