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실제 철강시장 자료를 모티프로 창작한 픽션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일부 기업·사건은 허구이며, 실제 기업·단체·사건과 관련이 없다. 실제 기업명은 공개된 시장정보와 가격정책을 설명하기 위한 범위에서만 사용했다.
프레스가 움직이지 않는 시간에도 공장에서는 소리가 났다. 부품 바구니가 부딪히는 소리, 지게차가 후진을 알리는 소리, 그리고 오늘 가공할 순서를 바꾸라는 전화벨이었다. 판금 가공업체의 생산관리 책임자 서지연은 작업지시서에서 한 줄을 지웠다. 빈자리는 곧장 다른 주문으로 채워지지 않았다. 도금강판 코일은 창고에 들어와 있었지만, 고객이 만들겠다고 했던 기계는 연말 재고조정 때문에 생산을 미뤘다.

"작업장에 먼저 알릴까요?" 반장이 물었다.
"아직은요. 주문 자체가 없어진 건지, 납품일만 밀린 건지부터 확인해야 해요."
"그동안 들어온 코일은 어디로 보냅니까?"
"여기서 잠깐 세워 둡니다. 다만 그냥 방치하진 않겠습니다."
서지연은 구매팀에서 받아 둔 발주서와 현장 작업표를 펼쳤다. 종이에서는 이미 작업이 시작된 것 같았지만, 기계 옆에는 빈 팔레트만 가지런했다. 거래가 끊긴 것은 아니었다. 거래가 언제 다시 시작될지 아무도 확답하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공급사에선 출하가 이어지고, 가공센터는 재고가 줄어들기를 기다리며, 최종 수요가는 완제품 창고가 비기를 기다렸다. 그 기다림은 같은 단어였지만 서로 다른 비용이었다.
창고 안의 서로 다른 표면
유통업체 영업담당자 문정호가 도착했을 때 서지연은 얇은 강판 시편 두 장을 손에 들고 있었다. 한 장은 냉연강판, 다른 한 장은 전기아연도금강판이었다. 그는 먼저 가격 이야기를 꺼냈다. 최근 수도권 유통시장에서 냉연강판은 톤당 96만 원으로 전주보다 1만 원 내려왔고, 전기아연도금강판은 105만~106만 원으로 역시 1만 원 떨어졌다는 시장 자료였다. 수요가 줄어드는데 가격까지 낮아지니 계약을 미루는 고객이 늘었다고 했다.
"같은 코일처럼 보이는데 값 차이가 크군요." 서지연이 말했다.
"겉모양만 보면 그렇죠. 그런데 고객 도면은 겉모양으로 승인하지 않잖습니까."
"그래서 곤란합니다. 구매팀은 싼 코일을 먼저 쓰자고 해요."
"가공팀은 재질과 표면처리 조건이 다르면 작업을 멈출 테고요."
문정호의 말은 맞았다. 냉연강판과 전기아연도금강판은 같은 판재류라도 적용 공정과 사용 조건이 다르다. 표면처리, 도장 적합성, 부식 환경에 따라 고객이 승인한 자재가 바뀔 수 있다. 용융아연도금강판까지 함께 묶어 '도금된 강판'이라고만 부르면 품질검사에서 문제가 생긴다. 서지연이 바꾸고 싶었던 것은 품목이 아니라 생산 순서였다. 그런데 판매처가 없는 품목을 앞세울수록 창고는 더 좁아졌다.
"유통가격이 떨어졌으니 다음 주문을 받을 때마다 재고평가부터 다시 해야겠네요." 그가 말했다.
"가격만 보고 손실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죠. 입고 당시 원가와 가공비, 고객별 사용 규격이 다르니까요."
"그렇다면 오늘 제가 할 일은 할인표를 보내는 게 아니겠군요."
"실제로 쓸 수 있는 주문을 찾아 주는 게 먼저입니다."
서지연은 창고에서 가장 오래 기다린 코일에 빨간 표시를 붙이려다 멈췄다. 재고는 오래된 순서대로 팔면 된다고 배웠다. 그러나 도금 종류가 다르고, 주문 규격이 다르고, 고객의 품질 승인 여부가 다르면 그 원칙만으로는 출하가 가능하지 않았다. 제품이 창고에 있다는 사실과 판매할 수 있다는 사실 사이에는 종종 공정표 한 장이 놓여 있었다.
견적서보다 먼저 확인할 것
생산현장 안쪽에서는 절곡기 앞에 서 있던 품질담당 조은호가 표면 흠집을 비추는 조명을 조정하고 있었다. 지연은 새 주문을 바로 끼워 넣어도 되는지 물었다. 그는 승인된 자재와 생산 조건이 남아 있느냐고 먼저 되물었다. 기계를 비우지 않으려고 예정에 없던 작업을 진행하면 생산성을 높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나중에 고객이 다른 재질을 요구하면 재가공과 반품 비용이 한꺼번에 돌아온다.
"가격이 낮아졌다는 건 들었어요. 그럼 대체 자재를 써도 되나요?" 지연이 물었다.
"시험하고 승인받으면 가능합니다. 지금은 아닙니다."
"고객은 일정표만 다시 보내 달라고 합니다."
"그 일정표에도 무엇으로 만들 건지는 남겨야죠. 빈칸으로 보내면 우리가 책임을 지게 됩니다."
그 말에 서지연은 수주 담당자에게 전화를 돌렸다. 고객사 구매팀은 당장 가공을 진행할 확답을 주지 못했다. 재고 축소가 우선이고, 연말까지 필요한 완제품을 다시 가늠하는 중이라고 했다. 대신 사용 규격이 바뀌지 않는다면 출하 시점과 대금 지급 조건을 나누어 협의해 보자는 뜻을 전했다. 그는 한발 물러선 주문이 반드시 사라진 주문은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사겠다는 건지 미루겠다는 건지, 우리도 구분이 필요합니다." 서지연이 말했다.
"내부 계획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고객 담당자가 답했다.
"그렇다면 우리 재고를 귀사 재고로 간주할 수는 없어요. 보관비를 누가 부담할지부터 정해야 합니다."
"출하를 나누면 안 될까요? 생산이 재개되는 순서대로요."
"가능성은 검토하겠습니다. 다만 승인 규격과 인수 조건은 문서로 남겨 주세요."
전화가 끝나자 서지연은 작업표에 있던 화살표의 방향을 바꿨다. 먼저 가공할 물량과 먼저 팔아야 할 재고는 서로 다를 수 있다. 다음 공정을 진행할 수 없는 주문은 작업장에 올리지 않는다. 반대로 고객의 자재 승인과 인수 기준이 확보된 주문이라면 마진이 크지 않아도 현금이 돌 수 있었다. 그는 주문의 크기보다 이행 가능성과 결제 확실성을 먼저 보겠다고 마음먹었다.
비어 있는 설비에도 비용이 있다
오후에 재무담당 한도윤이 사무실로 올라왔다. 손에는 이번 달 자금 집행표가 있었다. 원자재 매입대금은 약속한 날에 나가는데 고객 결제는 뒤로 밀리고 있었다. 냉연강판과 전기아연도금강판 시장이 약세라는 사실은 재무팀에도 낯설지 않았다. 그러나 재무팀이 더 걱정하는 것은 가격이 아니라 자금회수 기한이었다. 가격을 조금 깎아 바로 팔 것인지, 재고를 보유해 다음 주문을 기다릴 것인지가 현금잔고를 바꾸기 때문이다.
"저가 판매라도 해서 창고를 비우면 안 됩니까?" 한도윤이 물었다.
"팔 수 있는 물건과 팔아서는 안 되는 물건을 분리해야 합니다." 서지연이 답했다.
"안 팔고 버티면 금융비용이 붙습니다."
"규격이 맞지 않는 걸 억지로 출하하면 반품비가 붙죠. 그 비용은 누가 책임집니까?"
"결국 어느 쪽 비용이 더 큰지 비교해야겠네요."
"맞아요. 그리고 고객이 돈을 언제 주는지도 같이 봐야 합니다."
둘은 같은 재고표를 다른 색 펜으로 고쳤다. 도윤은 매입 원가, 회수 예정일, 자금 부담을 표시했다. 지연은 자재 규격, 가공 가능 여부, 고객 승인 상태를 표시했다. '오래된 것부터 팔자'라는 단순한 명령이 두 장의 기록을 거치자 '지금 출하해도 되는 것부터 팔자'라는 판단으로 바뀌었다. 서지연은 판매를 유보해야 하는 코일을 감추지 않았다. 다만 유보 이유를 금액과 작업조건 두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밖에서는 화물차가 한 대 나갔다. 대기하던 운전기사에게 현장 반장이 다른 납품처 주소를 안내했다. 오늘 출하한 것은 당초 밀린 고객의 물량이 아니었다. 규격이 이미 승인되고 대금 지급 조건이 확정된 다른 주문이었다. 수주팀은 매출 목표가 채워지지 않았다고 아쉬워했지만, 품질팀은 반품 가능성을 낮췄다고 평가했고 재무팀은 회수 일정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 안도했다. 같은 출하가 부서마다 다른 의미를 가졌다.
"오늘은 왜 저쪽 제품만 보냈어요?" 반장이 물었다.
"그쪽은 누가 받고 언제 결제하는지까지 확인됐으니까요."
"그럼 남은 코일은 계속 창고에 있습니까?"
"그냥 두지는 않습니다. 규격에 맞는 수요를 다시 찾고, 필요하면 가공 방식부터 바꿀 수 있는지 검토하겠습니다. 승인도 받지 않은 채 싸게 내보내지는 않을 겁니다."
서지연은 빈 작업지시서를 버리지 않고 제자리에 꽂아 두었다. 그 빈칸은 실패한 영업의 흔적처럼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출하하지 않은 이유를 정확히 남기는 것이 손실을 가려내는 첫 단계일 수도 있었다. 현장에선 언제나 기계가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오늘은 기계를 멈춰 세운 결정이 다음 주문을 지킬 수도 있다는 걸 배웠다.
그날의 가격 앞에서
그날 서지연이 바라본 시황은 냉연강판과 전기아연도금강판이 주간 하락세를 보이는 반면 산세강판과 용융아연도금강판은 보합인 시장이었다. 이 차이는 판재류 전체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공작기계 등 수요업체의 재고 축소, 전기아연도금강판의 가격경쟁, 제조사 출하 지속이라는 배경도 상품마다 파급 방식이 달랐다. 유통업체가 제시하는 할인가격 하나만으로 주문을 결정하기 어려운 이유였다.
문정호는 퇴근 무렵 다시 전화를 걸어 왔다. 그는 하루 동안 찾은 신규 수요처를 설명했다. 곧장 계약으로 이어진 곳은 없었다. 대신 필요한 표면처리와 규격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는 거래처가 생겼다고 했다. 서지연은 그에게 '최저가가 아니라 출하 가능한 재고부터 제시해 달라'고 말했다. 계약서는 아직 비어 있었지만, 아침에 비워 둔 작업지시서는 이제 무엇을 채워야 할지 알게 된 것 같았다.
"오늘은 결국 얼마나 팔았습니까?" 문정호가 물었다.
"그보다 중요한 걸 구분했어요. 팔 수 있는 것, 더 확인해야 하는 것, 팔면 안 되는 것을요."
"그게 영업 보고서엔 잘 안 보이겠군요."
"그래도 내일 창고 문을 열 때는 보일 겁니다."
불이 꺼진 가공라인 위로 은색 코일의 가장자리가 잠깐 빛났다. 가격표에는 떨어진 숫자와 유지된 숫자가 나란히 남아 있었다. 재고표에는 출하된 제품과 남은 제품이 나뉘어 있었다. 서지연은 어느 한쪽에 승리의 표시를 하지 않았다. 팔리지 않은 코일에도 순서가 있다. 그 순서를 정하는 것은 할인폭만이 아니라 누구에게, 어떤 규격으로, 어떤 약속을 지키며 보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그날의 가격
2026년 10월 23일 수도권 1차 유통시장 기준의 시장가격이다. 소설 속 개별 거래가격은 아니다.
| 품목 | 가격 | 주간 변동 |
|---|---|---|
| 냉연강판(CR) | 96만원/톤 (약 696달러/톤) | 전주 대비 1만원 하락 |
| 산세강판(PO) | 96만원/톤 (약 696달러/톤) | 전주 대비 보합 |
| 용융아연도금강판(GI) | 113만원/톤 (약 819달러/톤) | 전주 대비 보합 |
| 전기아연도금강판(EGI) | 105만~106만원/톤 (약 761~768달러/톤) | 전주 대비 1만원 하락 |
주: 달러 환산은 원자료의 후판 오퍼 비교에 사용된 참고 가정환율 1달러=1,380원을 기계적으로 적용한 값이며, 실제 거래환율이나 수입원가를 뜻하지 않는다. 가격 자료: 시장 취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