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실제 철강시장 자료를 모티프로 창작한 픽션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일부 기업·사건은 허구이며, 실제 기업·단체·사건과 관련이 없다. 실제 기업명은 공개된 시장정보와 가격정책을 설명하기 위한 범위에서만 사용했다.
철골자재 유통회사의 오전은 대개 트럭보다 전화가 먼저 깨운다. 그러나 그날 외곽 창고의 첫 소리는 출고 호출이 아니라 천장에서 내려오는 환풍기의 가벼운 떨림이었다. 창고장 서해진은 전날 붙여 둔 가격표를 내려다보다가, 문 앞에 서 있는 영업팀장에게 눈을 들었다. 가격은 적혀 있었고 제품도 있었지만 그 어느 것도 곧장 주문이 되지는 않았다.

“거래처에서 연락이 왔습니까?” 해진이 물었다. 영업팀장 윤태성은 휴대전화 화면을 내밀었다. “견적만 다시 달랍니다. 이번에는 국산과 수입산을 따로 쓰고 운반비도 분리해 달라네요.” 화면에는 공사 이름만 남아 있었다. 도면 번호와 최종 승인일, 납품 장소의 검수 책임자란은 비어 있었다. 해진은 그 빈칸이 가격보다 먼저 보였다.
태성은 유통가격이 다시 빠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10월 23일 주간 시황에서 국산 중소형 H형강은 톤당 117만~118만원으로 전주보다 1만원 내려왔고, 베트남산은 113만원 안팎이었다. 월초 제강사의 인상 공문을 보고 쌓았던 기대와 주문창에 들어오는 숫자는 전혀 달랐다. 창고의 제품은 공급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구매자의 결정을 기다리는 쪽에 가까웠다.
“상대가 값만 비교하는 동안 우리도 값을 더 낮춰야 합니까?” 해진이 물었다. “내릴 수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면 전화마저 끊길 겁니다.” 태성의 말에는 틀린 부분이 없었다. 그렇다고 옳은 결론이 반드시 거기서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영업이 원하는 것은 이번 주의 매출이고, 창고가 감당하는 것은 잘못 출고된 규격이 되돌아오는 다음 주의 비용이었다.
해진은 창고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H형강의 양쪽 플랜지와 가운데 웨브는 겉에서 보면 모두 같은 회색으로 이어져 있었다. 하지만 묶음마다 규격과 생산 이력, 보관 위치가 달랐다. 반듯하게 누워 있는 강재의 끝단에는 아직 손대지 않은 주문의 가능성이 남아 있었고, 한 번 절단해 버린 짧은 자투리에는 같은 기회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 있었다.
현장 출고반장 정기완이 바닥에 놓인 긴 형강을 가리켰다. “어젯밤 영업에서 미리 절단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빨리 답을 주면 상대가 결정하기 쉽다면서요.” 해진은 물었다. “최종 도면은요?” 기완이 고개를 저었다. “예비 도면뿐입니다. 바뀔 수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해진은 철골의 무게보다 그 종이의 가벼움을 더 걱정했다.
그가 입고대장을 펼쳤을 때, 품목 이름은 같은데 인수 조건이 다른 재고들이 한 줄에 겹쳐 있었다. 어떤 물량은 특정 공사에 맞춰 확보한 재고였고 어떤 물량은 범용 판매를 기대하며 들인 것이었다. 영업부서가 보는 창고의 수량은 한 덩어리였지만 창고장이 보는 수량은 가공 가능 여부, 증빙, 운송 제약, 재판매 가능성이 모두 다른 여러 개의 결정이었다.
가격 아래에 적히지 않은 것들
“싼 재고부터 빼면 되는 것 아닙니까?” 기완이 말했다. “싼 게 무엇을 뜻하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지지.” 해진은 길게 남은 재고와 절단 예정 재고를 나눠 표시했다. 같은 톤당 가격이라도 확정되지 않은 길이로 잘라 놓으면 다음 구매자가 요구하는 규격에 맞지 않을 수 있었다. 그때 남는 것은 할인 폭이 아니라 용도를 잃은 길이였다.
사무실에는 재무담당자 오소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놓아둔 것은 수금표와 창고 보관비 내역이었다. “전달보다 출하가 늦어졌습니다. 월말에 돈이 들어와야 새 매입도 조절할 수 있어요.” 해진은 말없이 장부의 빈칸을 살폈다. 외상 매출을 늘려 재고를 줄이는 방법과 현금흐름을 지키는 방법은, 시장이 좋을 때는 같은 방향이지만 침체기에는 정반대로 갈 수 있었다.
“할인을 해서라도 현금으로 받으면 어떻습니까?” 소령이 물었다. “현금이라는 이유만으로 회수불능의 주문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 말은 재고를 계속 안고 가자는 겁니까?” “아닙니다. 무엇을 확정해서 파는지 먼저 가리자는 겁니다.” 소령은 답을 듣고도 바로 동의하지 않았다. 보관료와 자금 비용은 내일도 쌓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해진은 낡은 계산기를 밀어놓고 거래처의 요구사항을 다시 썼다. 국산 H형강과 수입 H형강의 호가 차이는 분명했다. 그러나 실제 계약의 총부담은 제품가격만으로 결정되지 않았다. 운송 경로, 절단 여부, 필요한 증빙, 반품 책임, 결제 시점이 더해진 뒤에야 비교가 가능했다. 시장가격표는 협상의 시작점이지 납품을 끝내 주는 증서가 아니었다.
점심 무렵 거래처 현장대리인에게 전화가 왔다. 잠시 후 착공한다는 소규모 시설이었다. 현장에서는 자재를 서둘러 확보하고 싶지만 설계 검토는 아직 최종 결재를 받지 못한 상태였다. 해진은 익숙한 종류의 조급함을 들었다. 도면이 미완성이라는 사실을 숨기려는 조급함이 아니라, 현장 인력이 놀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을 자재업체에 먼저 전가하는 조급함이었다.
“가격이 더 떨어지기 전에 잡으라는 말도 있고, 더 기다리면 싸진다는 말도 있습니다.” 현장대리인이 말했다. 해진이 답했다. “저희가 확답할 수 있는 것은 현재 확인된 규격의 재고입니다. 확인되지 않은 치수는 주문이 아니라 질문입니다.” “그럼 자재를 미리 묶어 놓는 것도 안 됩니까?” “가능합니다. 다만 조건부 예약과 확정 발주를 같은 문서에 쓰면 안 됩니다.”
통화를 마친 뒤 해진은 태성에게 가격표 두 장을 가져오라고 했다. 하나는 최근 시중 거래가격이고 다른 하나는 월초의 제강사 판매정책을 정리한 종이였다. 일반형강 시장에서는 한국특강과 동국제강이 앵글·찬넬 판매가격 인상에 나섰지만, H형강 시세는 침체된 거래 속에서 오히려 밀렸다. 상품군마다 가격을 움직이는 힘도, 그 힘이 거래로 이어지는 길도 같지 않았다.
“우리도 인상 공문을 더 크게 붙일까요?” 태성이 반쯤 웃으며 물었다. 해진은 가격표를 한 번 뒤집었다. 종이 뒷면이 창고의 형광등 아래 하얗게 드러났다. “가격을 보이지 않게 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그 아래에 빠진 항목을 적자는 겁니다.” 태성은 먼저 규격, 그다음 인증·검수서류, 절단과 운반, 책임의 분기점, 마지막으로 결제조건을 적어 내려갔다.
다시 쓴 제안서
처음에는 모두가 그 목록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가격을 묻는 고객에게 확인할 것이 늘어나면 계약은 더 늦어진다. 하지만 해진이 요구한 것은 고객을 심문할 서류가 아니었다. 빠르게 답할 수 있는 문의와 답해서는 안 되는 문의를 구별하자는 것이었다. 재고가 있다고 말하는 순간까지는 누구나 같지만, 출고를 보증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확인 범위를 알아야 했다.
오후에는 운송협력업체 담당자가 현장 입차 동선을 확인해 왔다. 진입로 폭과 하차 장비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기완이 해진에게 말했다. “물건만 보내면 현장에서 알아서 할 거라고 합니다.” 해진이 물었다. “그 현장에서 하역을 못 하면 누구의 차가 서 있죠?” 기완은 잠시 침묵했다. 가느다란 운송 조건 하나가 두꺼운 형강보다 많은 사람을 멈춰 세울 수 있었다.
태성은 거래처가 다른 유통회사에서 더 낮은 가격을 들었다고 전했다. 확인되지 않은 호가를 사실인 양 받아 적을 수는 없었지만, 그 말이 주는 압박만큼은 실제였다. 그는 빠른 수주로 정적을 깨고 싶었다. 해진은 영업의 욕구를 이해했다. 전화가 울리지 않는 창고에서 가격을 지키자는 말은 자칫 창고장이 손실을 영업팀에 떠넘기는 변명처럼 들리기 쉬웠다.
“제안은 하십시오.” 해진이 먼저 말했다. 태성이 고개를 들었다. “다만 같은 견적서에 세 가지를 분리합시다. 바로 출고 가능한 표준 규격, 도면 승인 이후에만 절단할 제품, 재고와 서류가 확인되어야 조건을 확정할 수 있는 수입재입니다.” “그러면 최저가로는 못 이길 수도 있습니다.” “이길 수 없는 가격에 이겼다고 쓰는 것보다 낫습니다.”
소령은 수정된 제안서를 읽고 결제항목에서 멈췄다. “이대로면 계약 성립이 늦습니다.” 해진은 다른 칸을 짚었다. “대신 확정 발주 뒤에야 운송과 가공을 진행한다는 뜻이 분명해집니다.” 그녀는 비용을 다시 계산했다. 창고는 당장 빈칸을 매출로 바꾸지 못하겠지만, 책임이 정해지지 않은 주문을 매출처럼 취급하다 뒤늦게 손실로 돌릴 위험은 줄어들었다.
현장대리인은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나눠서 보내 주시면 설계사에게 확인하기는 쉽겠군요.” 태성이 대신 받았다. “출고일은 확정 도면과 하차 조건이 확인된 뒤에 약속드리겠습니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상대가 말했다. “그럼 오늘은 가견적으로 받겠습니다.” 거래가 성사된 것도 아니고 완전히 끊긴 것도 아니었다. 현장에서 흔히 가장 오래 지속되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였다.
퇴근 무렵 해진은 형강의 단면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플랜지는 웨브를 붙잡고 있었고 웨브는 떨어진 두 플랜지 사이의 힘을 전달했다. 이 단순한 형상 때문에 건물의 뼈대가 선다. 그런데 거래의 구조는 그보다 쉽게 흔들렸다. 제강사가 올린 고시가격과 유통시장의 하락, 재고를 털려는 영업과 지급일을 기다리는 재무, 기다릴 수 없는 현장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당기고 있었다.
기완이 문을 잠그기 전 마지막으로 물었다. “결국 오늘은 아무것도 안 나갔군요?” 해진은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그렇게 보일 겁니다. 하지만 내일 잘못 돌아올 물건을 오늘 보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날도 실적이 됩니까?” “아직은 아닙니다.” 그는 쉽게 위로하는 말을 고르지 않았다. 매출이 없다는 사실은 그대로였고, 보관료도 월말에 청구될 것이었다.
창고 밖에는 빈 트럭의 바퀴 자국만 옅게 남았다. 태성이 붙여 둔 새 안내표는 화려하지 않았다. 판매가격을 지우지 않았고, 그보다 위에 규격 확인과 출고 확약의 조건을 적었을 뿐이었다. 그날 해진이 뒤집은 것은 시세표의 숫자가 아니라, 가격을 먼저 주면 주문이 따라오리라는 오래된 순서였다. 가격을 묻는 사람은 여전히 많지 않았다. 다만 다음 전화를 받을 때 무엇부터 확인할지는 조금 분명해졌다.
그날의 가격
| 품목 | 가격 | 주간 변동 |
|---|---|---|
| 국산 중소형 H형강 (10/23 유통) | 117만~118만원/톤 (참고 $848~855/metric ton) | 전주 대비 -1만원/톤 |
| 베트남산 H형강 (10/23 유통) | 113만원/톤 안팎 (참고 약 $819/metric ton) | 10/20부터 판매가격 소폭 인상; 폭 미제시 |
| 국산 일반형강 앵글 (10/23) | 105만원/톤 안팎 (참고 약 $761/metric ton) | 유통가격 주간 변동 별도 미제시 |
| 국산 일반형강 찬넬 (10/23) | 108만원/톤 안팎 (참고 약 $783/metric ton) | 유통가격 주간 변동 별도 미제시 |
가격 출처: 시장, 「K스틸_2026-10-24 주간동향모음(소스)」 수록 2026년 10월 23일 시황. 달러 환산은 같은 원자료의 참고 가정환율 1달러=1,380원으로 단순 계산한 비교값이며, 10월 30일 실시간 환율이나 실거래 달러가격을 뜻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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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 요약: 국산 중소형 H형강 유통가격이 약세를 보이는 가운데, 가격만 묻는 잠정 주문 앞에서 창고장이 출고 조건과 책임을 다시 정의하는 산업소설이다. 가격보다 늦게 확정되는 도면, 운송, 결제의 부담을 철강 유통 현장 시각에서 풀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