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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산책] 같은 철 두 장의 가격은 왜 달라야 할까…그린스틸과 ‘레몬시장’

쇳빛은 같았다. 두 장의 열연코일을 나란히 놓으면 숙련된 구매 담당자도 겉모습만으로 어떤 제품이 더 적은 탄소를 배출하며 생산됐는지 알아보기 어렵다. 규격과 두께, 표면 상태, 기계적 성질이 같다면 전통적인 구매표에는 같은 품목으로 적힐 것이다. 그런데 한쪽 제품에는 ‘저탄소 생산 이력’이라는 별도의 가격표가 붙는다. 이 차이는 단순히 친환경이니까 비싸다는 설명만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구매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속성을 어떻게 확인하고, 그 정보에 얼마를 지불할 것인지 판단해야 한다.

일반 열연과 저탄소 철강의 가격·신뢰 비교 이미지

보이는 철과 보이지 않는 생산 과정

철강거래의 품질은 오랫동안 물성으로 증명됐다. 인장강도, 항복강도, 연신율, 치수공차, 표면 결함, 납기 준수율이 거래의 핵심이었다. 강종이 같고 시험성적서가 요구 조건을 충족하면 서로 다른 제철소 제품도 대체 가능한 상품으로 비교됐다. 생산 과정에서 발생한 온실가스 배출량은 전통적인 매매계약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제는 탄소 배출 정보의 제출과 확인이 조달 조건의 일부가 되면서 ‘같은 성능의 철’이라는 판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같은 열연이라도 고로·전로 경로와 전기로 경로, 사용 원료, 전력 배출계수, 조업 효율, 탄소 회계의 계산 경계 등에 따라 제품 단위 배출집약도가 달라질 수 있다. 특정 공법에 일률적으로 ‘깨끗하다’는 딱지를 붙일 수 없다는 뜻이다. 전기로는 스크랩과 전력의 구성에 영향을 받고, 고로 역시 원료와 부생가스 활용, 개선 설비에 영향을 받는다. 구매자에게 필요한 정보는 단순한 공정 이름이 아니라 어느 제품을 어떤 기준과 경계로 계산했는가에 관한 검증 가능한 기록이다.


중고차 시장을 설명한 경제학자의 통찰

1970년 경제학자 조지 애컬로프는 ‘레몬시장’ 논문에서 판매자가 상품의 실제 품질을 잘 알지만 구매자는 그렇지 못한 상황을 분석했다. 구매자가 평균 품질을 전제로 값을 매기면 좋은 상품을 파는 사람은 정당한 값을 받기 어려워진다. 이런 정보 비대칭이 심해질 때 좋은 상품이 시장에서 밀려나는 역선택이 나타날 수 있다. 철강재의 기계적 성능 불량과 탄소정보의 불확실성은 다른 문제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특성을 구매자가 쉽게 검증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저탄소 철강시장에도 유용한 비유다.


저탄소 생산에 투자한 철강사는 감축 성과에 해당하는 프리미엄을 요구한다. 하지만 구매자가 배출 수치의 산정 범위, 외부 검증, 생산 이력과 공급망의 연결을 신뢰하지 못하면 추가 대가를 지급할 이유가 약해진다. 반대로 검증되지 않은 ‘그린’ 표시가 흔해지면 진짜 감축 성과를 가진 제품의 신호도 희미해진다. 저탄소 철강의 성장은 생산기술 경쟁인 동시에 정보의 정확성과 비교 가능성을 높이는 경쟁이다.


프리미엄이 가격표에 남으려면

구매자가 저탄소 철강에 돈을 더 내는 이유는 서로 다르다. 어떤 기업은 자체 감축 목표를, 어떤 기업은 고객사의 공급망 정보 요구를 우선한다. 유럽 수출기업에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관련 신고와 비용을 관리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 수요가 곧바로 시장 전체의 고정된 프리미엄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수요가 약하고 최종 제품의 가격 전가가 어렵다면 구매 담당자는 기존 제품과의 가격차를 엄격하게 따진다.


2026년 유럽 철강시장은 이런 긴장을 잘 드러낸다. 유럽철강협회 EUROFER는 2026년 8월 전망에서 EU의 2026년 철강 명목소비 증가율을 0.1%로 내다봤다. 건설과 기계류 등 부문별 회복이 엇갈리고 자동차 생산은 추가 둔화가 전망됐다. 수요 회복이 미약한 가운데 탄소 감축이라는 목표가 중요해도, 그 목표에 얼마만큼의 추가 비용을 쓸 수 있는지는 별도의 문제다. 좋은 방향이라는 공감과 실제 계약 성사 가격 사이에는 적지 않은 거리가 존재한다.


CBAM이 바꾸는 거래 문서

EU의 CBAM 확정 운영체계는 2026년 1월 1일부터 적용됐다. EU 집행위원회의 안내에 따르면 관련 대상 상품을 단일 질량 기준 연간 50톤 초과 수입하는 수입자 또는 간접 통관대리인에게 허가된 CBAM 신고인 지위가 요구된다. 인증서 가격은 EU 배출권거래제 경매가격에 연동되고 2026년에는 분기 평균값을 적용한다. CBAM이 저탄소 철강의 시장 프리미엄을 자동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품 배출정보의 관리 역량을 수입 거래의 절차와 비용에 연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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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철강 수출상사가 준비할 견적서의 언어도 달라진다. 강종, 규격, 수량, 단가, 원산지, 선적일, 결제조건에 더해 제품별 배출량 자료, 계산 경계, 자료 제공 책임, 고객이 요구하는 인증 방식과 주문 단위 추적 가능성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원산지 증명서와 탄소 배출 입증자료는 다른 문서다. 거래 과정에서 자료를 확보하지 못하거나 서로 다른 공급망의 정보가 혼동되면 가격할인보다 훨씬 큰 계약상 분쟁을 부를 수 있다.


유통과 가공 단계가 직면하는 현실

유통상은 여러 제철소의 코일을 매입해 보관하고 절단·슬리팅·가공해 다수 수요가에게 판매한다. 물량을 혼합해 재고를 운영할수록 원래의 탄소 속성과 가공 후 상품의 관계를 설명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고객이 특정 로트의 배출정보를 요구한다면 기존 밀시트만으로는 부족하다. 입고 자료, 로트별 재고, 가공실적, 출하 문서를 연결해 놓는 실무가 새롭게 중요해진다.


그렇다고 모든 유통상이 당장 독립 창고를 마련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실제 요구되는 추적 방법은 계약, 인증 체계, 물리적 분리와 장부관리 허용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 중요한 것은 자사가 고객에게 약속한 환경 속성이 제철소가 제공한 검증 범위를 벗어나지 않도록 관리하는 일이다. 과도한 판매 문구는 한 번의 프리미엄을 만들 수 있을지 몰라도, 잘못된 정보가 드러나면 오랫동안 축적한 거래 신뢰를 잃게 된다.


같은 철 두 장, 다른 구매 조건

항목전통적 열연 구매저탄소 속성 구매
품질 확인강종·규격·물성기본 품질 + 배출정보
대표 서류밀시트·상업서류기본 서류 + 검증·추적성 자료
가격 결정제품가·가공비·물류비기본 조건 + 감축·검증 가치
주요 위험품질·납기·대금기본 위험 + 정보 불일치

이 표는 제품별 프리미엄의 정해진 산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감축 투자비가 곧 판매가격이 되는 것도 아니다. 고객의 감축 목표, 대체 조달 가능성, 검증 신뢰, 경쟁 밀의 조건, 국가별 규제에 따라 실제 가격은 달라진다. 무엇보다 저탄소라는 주장이 정량 자료로 확인 가능해야 한다.


철강정보원 분석 — 신뢰가 원가이자 경쟁력이 되는 순간

저탄소 철강시장에서 먼저 거래되는 것은 추상적인 선의가 아니라 검증 가능한 약속이다. 철강사에는 측정·검증·추적의 비용이 생기지만 기록이 쌓이면 차별화된 제품의 자산이 된다. 수출상사와 코일센터에도 관리 부담이 늘어나지만 동시에 해외 고객이 안심하고 주문할 수 있는 공급망을 조직하는 기회가 열린다.


앞으로 확인할 변수는 세 가지다. 첫째, 유럽 등 주요 시장의 저탄소 구매가 시범 물량을 넘어 정기 계약으로 확대되는가. 둘째, 제철소가 제시하는 배출자료를 유통·가공 단계에서도 로트별로 연결할 수 있는가. 셋째, 수요 부진 속에서도 구매자가 검증된 감축 성과에 지속적으로 프리미엄을 지급하는가. 그중 하나라도 빠지면 그린스틸 가격표는 생산자의 희망가격에 머물 가능성이 있다.


같은 철 두 장이 작업장 바닥에 놓여 있다. 어느 쪽도 더 반짝이지 않는다. 다만 한쪽에는 만들어진 과정이 숫자와 기록으로 남아 있다. 시장은 이제 철의 표면뿐 아니라 그 뒤에 있는 과정을 읽으려 한다. 그 기록을 믿게 만드는 일이 저탄소 철강 가격을 결정하는 출발점이다.


주요 출처: EU 집행위원회 CBAM 확정 운영 안내(https://taxation-customs.ec.europa.eu/carbon-border-adjustment-mechanism/cbam-definitive-regime_en), EUROFER 2026년 3분기 철강시장 전망(https://european-steel.eu/publications/economic-market-outlook/economic-and-steel-market-outlook-2026-2027-third-quarter), George Akerlof, The Market for Lemons(1970, https://doi.org/10.2307/1879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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