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판 유통에서 케이블트레이 제조업으로 확장한 코어웨이시스템
공장은 완공됐지만 외상대금의 연결고리는 끝내 끊어졌다

이번 회차 주요 등장인물
| 가상 회사 | 회사 특성 | 중심인물 |
|---|---|---|
| 코어웨이시스템 | 철판 유통에서 케이블트레이·시스템찬넬 제조업으로 확장 | 서정호 대표 |
| 새결판재 | 열연·냉연·도금강판을 공급하는 종합 판재 유통사 | 문기석 전무 |
| 온축강재 | 아연도금강판과 건축용 판재 전문 유통사 | 이재문 대표 |
| 정밀컷코리아 | 레이저 절단·절곡 및 철판 가공센터 | 최은서 상무 |
| 태광설비산업 | 코어웨이시스템의 주요 건설설비 수요업체 | 배성진 대표 |
| 마루산업연구소 | 철강·건설산업 분석기관 | 차윤호 연구위원 |
월요일 오전 8시 37분, 새결판재 문기석 전무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자금관리팀의 조영환 부장이었다.
“전무님, 코어웨이시스템에서 오늘 입금하기로 한 대금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문기석은 창고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췄다.
새결판재는 코어웨이시스템에 열연강판과 산세강판, 아연도금강판을 공급하고 있었다.
코어웨이시스템은 철판을 절단해 판매하던 유통·가공업체에서 출발해 케이블트레이와 시스템찬넬을 생산하는 제조업체로 성장한 회사였다.
불과 몇 달 전에는 수도권에 새 공장을 완공했다.
회사 규모가 커졌고, 납품처도 늘었다.
업계에서는 철판 유통업체가 제조업 전환에 성공한 사례로 거론되기도 했다.
“경리팀과 통화는 했나?”
문기석이 물었다.
“대표가 외부에 있다는 말만 반복합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다른 거래처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조 부장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코어웨이시스템이 법원에 회생절차를 신청했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습니다.”
문기석의 시선이 창고 출고장으로 향했다.
코어웨이시스템으로 보낼 아연도금강판 코일이 화물차에 실리고 있었다.
“차량부터 세워.”
문기석이 말했다.
“상차가 끝났더라도 출고장 밖으로 내보내지 마.”
철판을 팔던 사람이 공장을 세우다
코어웨이시스템의 서정호 대표는 오랫동안 철강 유통업계에서 일했다.
그는 열연강판과 냉연강판, 아연도금강판을 매입해 건설자재업체와 전기설비업체에 판매하면서 철강사업을 배웠다.
하지만 철판 유통만으로 남길 수 있는 마진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철강사와 대형 유통업체 사이에서 매입가격을 낮추기는 어려웠고, 수요업체들은 경쟁사의 견적서를 내밀며 판매가격을 깎았다.
서정호는 철판을 그대로 판매하는 방식으로는 회사를 키우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철판을 파는 회사가 아니라 철판으로 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돼야 합니다.”
그가 직원들에게 자주 하던 말이었다.
코어웨이시스템은 케이블트레이와 시스템찬넬 생산을 시작했다.
공장이나 물류센터, 반도체 설비, 데이터센터에 들어가는 전선 지지구조물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외부 가공업체에 절단과 절곡을 맡겼다.
수주가 늘자 자체 설비를 들였다.
레이저 절단기와 절곡기가 들어왔고, 용접설비와 도장라인도 추가됐다.
회사는 더 넓은 공장으로 이전했다.
새 공장의 벽에는 ‘철강 종합 제조기업’이라는 문구가 붙었다.
매출도 빠르게 늘었다.
그러나 매출이 늘어나는 속도만큼 회사 통장의 현금이 늘어나지는 않았다.
공장은 커졌고 결제일은 길어졌다
철강 유통은 재고와 매출채권을 관리하는 사업이다.
철판을 매입해 적정 마진을 붙여 판매하고, 정해진 날짜에 대금을 회수해야 한다.
제조업은 그보다 복잡했다.
원재료를 매입한 뒤 절단하고, 절곡하고, 용접하고, 조립해야 했다.
설비 가동에 필요한 전기료와 인건비가 발생했다.
제품 규격이 맞지 않으면 재가공하거나 폐기해야 했다.
납기가 늦어지면 지체상금을 부담할 수도 있었다.
공장을 건설하고 설비를 도입하는 데 들어간 자금도 매달 이자와 리스료로 돌아왔다.
코어웨이시스템이 새결판재에 지급해야 할 철판대금은 먼저 만기가 도래했다.
하지만 건설·설비업체에 납품한 케이블트레이 대금은 그보다 늦게 들어왔다.
일부 수요업체는 납품이 끝난 뒤에도 검수와 기성확정을 이유로 결제를 미뤘다.
현금으로 지급하던 거래처가 어음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어음 만기는 점점 길어졌다.
코어웨이시스템의 장부에는 매출이 기록됐다.
그러나 통장에는 그 매출에 해당하는 현금이 들어오지 않았다.
공장이 바쁘게 돌아갈수록 더 많은 철판이 필요했다.
더 많은 철판을 외상으로 매입할수록 지급해야 할 대금도 늘어났다.
회사의 외형은 성장하고 있었지만 자금의 빈틈은 더 넓어지고 있었다.
준공식에서 보이지 않았던 것
온축강재 이재문 대표는 코어웨이시스템의 공장 준공식에 참석했던 날을 기억했다.
새 공장 입구에는 금융기관과 거래업체가 보낸 축하 화환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공장 안에서는 새로 도입한 레이저 절단기가 시운전을 하고 있었다.
아연도금강판이 설비 안으로 들어가자 케이블트레이에 사용할 부품이 빠른 속도로 잘려 나왔다.
서정호 대표는 방문객들에게 자신 있게 말했다.
“이제 절단부터 절곡, 조립까지 한 공장에서 처리할 수 있습니다.”
이재문도 코어웨이시스템이 한 단계 도약했다고 생각했다.
새 공장이 있었다.
최신 설비가 있었다.
직원이 늘었고 수주잔고도 충분하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러나 준공식에서 누구도 묻지 않은 것이 있었다.
케이블트레이 한 개를 생산해 실제로 얼마가 남는지 알 수 없었다.
설비 가동률이 손익분기점을 넘을 수 있는지도 확인하지 않았다.
매출이 증가한 만큼 영업현금흐름이 좋아졌는지도 살펴보지 않았다.
공장과 설비는 눈에 보였다.
미수금과 받을어음, 금융비용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회사가 잘되고 있다는 판단은 대부분 눈에 보이는 것들로 이뤄졌다.
가격을 낮춰서라도 설비를 돌려야 했다
코어웨이시스템의 문제는 주문이 완전히 끊긴 데서 시작되지 않았다.
공장을 가동할 일감은 있었다.
문제는 그 일감에서 충분한 이익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건설경기가 악화하면서 케이블트레이와 시스템찬넬 업체들의 수주 경쟁이 심해졌다.
발주업체들은 여러 제조사의 견적을 비교하며 납품가격을 낮췄다.
코어웨이시스템도 새 공장의 가동률을 높이기 위해 낮은 가격으로 주문을 받았다.
설비를 세워 두면 감가상각비와 금융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낮은 가격으로 제품을 생산하면 매출은 늘어도 이익은 남지 않았다.
원재료 가격이 오르거나 불량이 발생하면 주문 한 건이 그대로 손실로 바뀌었다.
공장을 멈추면 고정비 때문에 손실이 발생했다.
공장을 돌리면 운전자금이 더 필요했다.
코어웨이시스템은 멈출 수도, 충분한 이익을 내며 달릴 수도 없는 상태에 빠졌다.
주요 거래처에서 끊어진 현금
결정적인 문제는 주요 수요업체인 태광설비산업에서 발생했다.
태광설비산업은 대형 건설현장에 전기설비와 케이블트레이를 공급하는 업체였다.
코어웨이시스템은 이 회사의 주문을 확보하면서 생산량을 크게 늘렸다.
그러나 태광설비산업의 자금 사정이 악화하면서 납품대금 지급이 늦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주일이었다.
다음에는 한 달이 됐다.
현금 결제 일부가 어음으로 바뀌었다.
이미 발행된 어음의 만기를 연장해 달라는 요청도 들어왔다.
서정호 대표는 거래를 중단하지 못했다.
태광설비산업이 살아나야 코어웨이시스템도 밀린 대금을 받을 수 있었다.
납품을 끊으면 기존 채권을 회수하기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결국 코어웨이시스템은 대금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추가 제품을 생산했다.
제품 생산에 필요한 철판은 새결판재와 온축강재 등으로부터 외상으로 매입했다.
수요업체에서 받지 못한 돈이 철판 공급업체에 지급하지 못하는 돈으로 바뀌었다.
태광설비산업의 자금난은 코어웨이시스템을 거쳐 판재 유통업체들의 매출채권으로 이동했다.
월요일 오후의 채권자 회의
회생 신청설이 퍼진 날 오후, 새결판재 회의실에 복수의 철판 공급업체 관계자가 모였다.
온축강재 이재문 대표와 정밀컷코리아 최은서 상무도 참석했다.
정밀컷코리아는 코어웨이시스템의 주문을 받아 후판과 열연강판을 절단·절곡해 납품해 왔다.
원재료를 직접 공급한 업체도 있었고 가공비를 받지 못한 업체도 있었다.
참석자들의 피해 형태는 달랐지만 질문은 같았다.
‘얼마를 받을 수 있는가.’
새결판재 문기석 전무가 화이트보드에 확인사항을 적었다.
| 확인 대상 | 주요 내용 |
|---|---|
| 외상매출금 | 세금계산서·거래명세표·미수금 잔액 |
| 받을어음 | 발행인·배서인·만기일·부도 여부 |
| 담보 및 보증 | 근저당권·질권·대표자 보증 여부 |
| 미납품 물량 | 상차·운송·검수 및 소유권 이전 여부 |
| 회생채권 | 법원이 정한 기간 내 신고 필요 |
| 상계 가능성 | 매입채무·예수금 등 반대채권 확인 |
한 공급업체 관계자가 물었다.
“공장과 건물이 있으니 매각하면 철판대금을 받을 수 있지 않습니까?”
최은서가 대답했다.
“공장에 선순위 담보가 얼마나 설정돼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토지와 건물, 생산설비의 가치가 높더라도 금융기관의 담보권이 먼저 설정돼 있다면 처분대금은 우선 담보권자에게 돌아갈 수 있다.
철판 공급업체의 외상매출금과 받을어음은 담보가 없다면 회생채권으로 분류될 가능성이 크다.
회생절차에서는 채권 원금 일부가 조정될 수 있다.
나머지 채권도 장기간에 걸쳐 분할 상환될 수 있다.
회사가 회생계획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면 예상했던 변제액조차 회수하지 못할 수 있었다.
문기석이 말했다.
“아직 법원의 회생절차 개시결정과 전체 채무 규모가 확인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참석자들을 차례로 바라봤다.
“피해액을 추정해 시장에 퍼뜨리기 전에 각 회사의 채권부터 정확히 확인해야 합니다.”
기존 채권을 받기 위한 신규 출고
새결판재도 위험 신호를 전혀 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코어웨이시스템의 결제는 조금씩 늦어지고 있었다.
현금 거래가 줄면서 어음 비중이 늘었다.
처음에는 1개월짜리였던 결제 지연이 다음 거래에서는 더 길어졌다.
서정호 대표는 그때마다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했다.
“대형 현장의 기성금이 다음 주에 들어옵니다.”
“신축 공장 담보대출이 실행되면 밀린 대금을 정리하겠습니다.”
“설비자금 대출의 만기 연장만 마무리되면 정상화됩니다.”
설명에는 항상 새로운 날짜가 붙었다.
공급업체들은 그 날짜가 오면 밀린 대금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거래를 중단하지 못한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코어웨이시스템에 철판을 공급해야 공장이 돌아갈 수 있었다.
공장이 돌아가야 제품을 납품할 수 있었다.
제품대금이 들어와야 기존 외상대금을 갚을 수 있었다.
기존 채권을 회수하기 위해 신규 외상공급을 이어가는 구조였다.
그러나 새로 공급한 철판대금이 다시 미수금으로 남으면서 채권 규모는 더 커졌다.
문기석은 거래원장에 기록된 마지막 출고내역을 바라봤다.
“채권을 회수하려고 계속 공급했는데, 결과적으로 채권만 늘어났군.”
자금관리팀 조영환 부장이 말했다.
“출고를 중단하면 이전 대금을 못 받을 것 같았습니다.”
문기석은 원장을 덮었다.
“우리가 철판만 공급한 것이 아니야.”
그가 말했다.
“그 회사가 버틸 시간을 외상으로 공급한 거지.”
완공 뒤에 나온 회생 신청
시장에서는 코어웨이시스템이 새 공장을 완공한 이후 회생절차를 신청했다는 점을 두고 여러 이야기가 나왔다.
일부에서는 회사가 법률대리인과 신청 시기를 사전에 조율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다른 쪽에서는 공장 완공 이후 금융 부담과 운전자금 부족이 한꺼번에 드러난 것이라고 해석했다.
문기석은 직원들에게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를 외부에 전달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기업이 회생절차를 신청하기 전에 변호사와 자금 상황, 신청 시기, 필요한 서류를 협의하는 것은 일반적인 절차다.
법률자문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채권자를 속이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건물 완공과 회생 신청 시점이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고의성을 판단해서도 안 된다.
다만 회생 신청 직전까지 신규 철판을 공급받았다면 거래 경위는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회사 측이 지급불능 가능성을 언제 인식했는지, 신규 주문 당시 공급업체에 어떤 설명을 했는지, 특정 채권자에게만 우선 변제한 사실이 있는지는 객관적인 자료로 판단해야 했다.
의문을 제기하는 것과 혐의를 단정하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제조업 전환은 현금흐름의 전환이다
마루산업연구소 차윤호 연구위원은 철강 유통업체의 제조업 진출 사례를 분석했다.
그는 제조업 확장 자체를 실패의 원인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봤다.
철판 유통업체가 절단·절곡·용접과 완제품 생산으로 부가가치를 높이는 전략은 충분히 합리적일 수 있었다.
문제는 제조사업의 수익성과 운전자금을 제대로 계산하지 않은 상태에서 설비투자와 외상거래를 동시에 확대하는 경우였다.
| 구분 | 철판 유통 중심 | 가공·제조업 확장 이후 |
|---|---|---|
| 주요 투자 | 재고·창고·운송 | 공장·설비·인력·유지보수 |
| 이익 결정요인 | 매입·판매 가격 차이 | 제품가격·가공비·가동률·불량률 |
| 자금 회수 | 철판 판매대금 | 납품·검수·기성확정 이후 |
| 주요 위험 | 재고평가손·외상매출 | 적자 수주·저가동·공사대금 지연 |
| 부실 신호 | 결제 지연·어음 증가 | 매출채권 장기화·차입금 증가 |
차윤호는 보고서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제조업 전환은 제품군을 추가하는 일이 아니라 회사의 현금흐름 구조를 바꾸는 일이다.’
공장을 세우기 전에는 예상 수주량만 볼 것이 아니라 손익분기 가동률을 계산해야 했다.
설비가 돌아갈 수 있는지보다 설비를 돌렸을 때 실제 현금이 남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매출액보다 영업현금흐름과 매출채권 회수기간을 먼저 살펴야 했다.
신용한도표가 바뀌다
코어웨이시스템의 회생 신청 이후 새결판재는 거래처 신용평가 기준을 전면적으로 바꿨다.
과거에는 매출 증가와 공장 신축, 보유 설비가 신용평가에서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새 기준에서는 매출보다 현금흐름이 우선됐다.
공장을 확장한 회사일수록 금융비용과 설비 가동률을 별도로 확인하기로 했다.
외상거래의 결제기간이 한 차례라도 연장되면 관리대상으로 분류했다.
현금 결제가 어음으로 바뀌거나 어음 만기가 길어지는 경우에는 신규 출고 한도를 줄이도록 했다.
| 위험 신호 | 관리 방향 |
|---|---|
| 결제일 반복 지연 | 신규 출고 축소 및 현금거래 전환 |
| 어음 비중 증가 | 발행인·배서인 신용도 재확인 |
| 만기 연장 요청 | 기존 채권 회수계획 우선 점검 |
| 갑작스러운 대량 주문 | 자금난에 따른 재고 확보 가능성 확인 |
| 저가 수주 확대 | 제품별 수익성과 현금흐름 점검 |
| 공장·설비 급증 | 차입금·담보설정·가동률 확인 |
| 주요 거래처 의존 | 수요업체의 결제상태까지 점검 |
문기석은 영업팀 회의에서 말했다.
“공장이 크다는 이유로 신용한도를 늘리지 마라.”
직원들이 조용히 그의 말을 들었다.
“매출이 늘었다는 이유만으로 회사가 좋아졌다고 판단해서도 안 된다.”
그는 코어웨이시스템의 미수금 원장을 들어 보였다.
“거래처가 얼마나 많이 파는지가 아니라, 판 돈이 실제로 언제 들어오는지를 봐야 한다.”
시장을 떠도는 두 번째 이름
코어웨이시스템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또 다른 건설·가공업체의 부도설이 시장에 돌기 시작했다.
서울에 사무실을 두고 수도권에 공장을 운영하는 업체라는 설명이 붙었다.
일부 유통업체는 해당 회사와 거래했다는 업체들을 찾아 피해 규모를 묻기 시작했다.
문기석은 직원들에게 경고했다.
“확인되지 않은 회사 이름을 시장에 퍼뜨리지 마라.”
부도설은 사실로 확인되기 전부터 기업의 자금줄을 막을 수 있다.
공급업체가 동시에 출고를 중단하고 금융기관이 여신을 회수하면 정상적인 회사도 갑작스러운 유동성 위기에 빠질 수 있다.
소문이 돌 때 공급업체가 해야 할 일은 업체명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사가 보유한 외상매출금과 받을어음, 결제일과 담보자료를 먼저 확인해야 했다.
이상 징후가 발견되면 출고 조건과 신용한도를 조정해야 했다.
확인되지 않은 부도설은 사실과 분리해 관리해야 했다.
공장에 불이 꺼진 날
회생 신청 며칠 뒤, 코어웨이시스템의 새 공장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출입문 옆에는 납품을 기다리던 아연도금강판 코일이 비닐에 덮인 채 놓여 있었다.
공장 안에는 절곡을 마치지 못한 케이블트레이 반제품이 설비 옆에 쌓여 있었다.
레이저 절단기의 전원도 꺼져 있었다.
문기석은 채권자료를 확인하기 위해 공장을 방문했다.
불과 몇 달 전 준공식에서 보았던 공장과 같은 장소였다.
그때는 기계 소리 때문에 옆 사람의 말도 잘 들리지 않았다.
이날은 멀리서 떨어지는 빗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공장은 완공돼 있었다.
설비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장부에는 매출도 기록돼 있었다.
그러나 철판 공급업체에 지급할 현금은 없었다.
새 공장은 금융기관의 담보가 됐다.
생산설비는 감정평가의 대상이 됐다.
공장에 투입된 철판은 완제품이나 장기 매출채권으로 바뀌었다.
공급업체가 받지 못한 철판대금만 회생채권으로 남을 가능성이 커졌다.
문기석은 가동을 멈춘 절곡기를 한동안 바라봤다.
공장이 멈춘 날 회사가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결제기간이 늘어났는데도 공급을 계속했던 날부터 균열은 시작되고 있었다.
철판보다 먼저 확인해야 할 것
새결판재로 돌아온 문기석은 코어웨이시스템으로 출고하려던 코일 앞에 섰다.
코일에는 ‘출고 보류’라는 표지가 붙어 있었다.
조영환 부장이 물었다.
“앞으로 제조업체와 거래할 때 무엇을 가장 먼저 봐야 합니까?”
문기석은 코일 표면을 손으로 두드렸다.
둔탁한 금속음이 창고 안으로 퍼졌다.
“공장의 크기도 아니고, 설비의 숫자도 아니야.”
그가 대답했다.
“매출액은 더더욱 아니고.”
문기석은 코어웨이시스템의 거래원장을 펼쳤다.
결제일이 한 줄씩 뒤로 밀려 있었다.
현금은 어음으로 바뀌었고, 어음은 다시 더 긴 만기로 바뀌었다.
“그 회사가 철판을 제품으로 만들 수 있는지만 보면 안 된다.”
문기석이 말했다.
“그 제품을 다시 현금으로 만들 수 있는지를 봐야 한다.”
공장 밖으로 늦은 오후의 햇빛이 기울고 있었다.
멀리서 화물차 한 대가 빈 적재함을 싣고 출고장을 빠져나갔다.
코어웨이시스템으로 갈 예정이던 철판은 창고에 남았다.
그러나 이미 출고된 철판의 대금은 돌아오지 않았다.
철강 유통업체들이 공급한 것은 철판만이 아니었다.
그 회사가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과, 다음 결제일까지 버틸 시간도 함께 공급한 것이었다.
그 시간이 끝나자 공장보다 먼저 외상거래의 신뢰가 무너졌다.
이번 회차가 남긴 경고
코어웨이시스템의 이야기는 제조업 진출 자체가 위험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철강 유통업체가 가공과 제조를 통해 부가가치를 높이는 것은 필요한 성장전략이 될 수 있다.
다만 설비투자와 외상매입을 동시에 확대하면서 제품별 수익성과 현금흐름을 확보하지 못하면 외형 성장이 오히려 유동성 위기를 앞당길 수 있다.
철강 공급업체 역시 거래처의 공장과 매출 규모만으로 신용한도를 결정해서는 안 된다.
결제기간 연장, 받을어음 증가, 반복적인 만기 연기, 주요 수요처의 자금난, 갑작스러운 대량 주문은 유동성 악화를 알리는 신호일 수 있다.
기존 채권을 회수하기 위해 신규 외상공급을 계속하는 방식은 피해액을 확대할 위험이 있다.
회생절차가 개시되면 공급업체는 계약서와 세금계산서, 거래명세표, 받을어음, 담보 및 보증자료를 정리해 법원이 정한 기간 안에 채권을 신고해야 한다.
실제 회수 가능액은 채권의 성격과 담보 순위, 계속기업가치, 법원이 인가하는 회생계획에 따라 달라진다.
※ 본 작품에 등장하는 코어웨이시스템, 새결판재, 온축강재, 정밀컷코리아, 태광설비산업, 마루산업연구소와 모든 인물은 이번 회차를 위해 새로 만든 가상의 명칭이다. 복수의 철강 유통·가공업계 사례와 일반적인 회생절차 구조를 바탕으로 재구성했으며 특정 실제 기업이나 개인과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는다. 회생절차 개시 여부와 채무액, 피해업체, 신청 배경 및 고의성은 법원 결정과 객관적인 자료로 확인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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