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7월 31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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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계절⑫ 회생채권자 명단


오른 것은 가격표뿐이었다

아크트레이솔루션의 공장은 멈춘 뒤에야 더 크게 보였다.


야드 한쪽에는 아직 사용하지 않은 H형강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공장 안쪽에는 열연 코일과 용융아연도금강판이 남아 있었고, 절곡기 옆에는 가공을 마치지 못한 반제품이 작업순서대로 놓여 있었다.

설비는 새것이었다.


바닥의 안전선도 선명했고 천장 크레인의 도장도 벗겨지지 않았다. 공장 벽면에 붙은 생산목표표에는 월간 출하량을 늘리겠다는 숫자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기계는 움직이지 않았다.


김민철은 코일 측면에 적힌 입고일을 확인했다. 청람철강이 마지막으로 출고한 열연이었다. 아크트레이솔루션이 법원에 기업회생을 신청하기 열흘 전에 들어온 물량이었다.


“이 코일은 아직 손대지 않은 것 같은데.”

공장 관리팀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는 그렇습니다. 같은 날짜에 입고된 물량 가운데 절반 정도는 이미 가공됐습니다.”

“가공한 제품은 어디 있나?”

“저쪽 완제품 창고에 있습니다. 수도권 물류센터 납품분입니다.”

“발주처에서 돈은 들어왔나?”


직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생산팀은 주문과 납기를 알고 있었지만 돈의 흐름은 경영관리팀의 일이었다. 경영관리팀 직원 대부분은 전날부터 연락이 닿지 않았다.

김민철은 공장 안을 천천히 걸었다.


철강재는 있었다.

설비도 있었다.

납품할 주문도 남아 있었다.

하지만 전기료와 임금, 운송비를 누가 먼저 부담할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공장을 갖는 것과 공장을 돌리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제품을 만드는 것과 대금을 회수하는 것도 다른 일이었다.

대한플레이트 박준호 대표가 멈춰 선 절곡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설비가 아깝군요.”

세광스틸서비스 이유진 팀장이 대답했다.

“그래서 다들 믿었던 겁니다. 공장이 실제로 있었고, 주문도 계속 늘었으니까요.”


김민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장의 크기는 신용을 설명하는 데 유용했다. 그러나 공장의 외벽은 통장 잔액을 보여주지 않았다. 최신 설비도 매출채권 회수기간까지 알려주지는 않았다.

그들이 믿었던 것은 공장이 아니라, 공장이 계속 돌아갈 것이라는 가정이었다.


그 가정이 멈춘 자리에 철강재와 미수금만 남아 있었다.



법원에서 온 봉투


청람철강으로 돌아왔을 때 법원 서류가 도착해 있었다.

자금관리팀장은 이미 봉투의 내용을 짐작하고 있었다. 전날 밤부터 법원 사건조회 화면을 여러 차례 확인했기 때문이다.

서류에는 아크트레이솔루션에 대한 보전처분과 포괄적 금지명령 관련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함께 확인한 채권자 목록에는 청람철강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그런데 금액이 맞지 않았다.


“마지막 출고분이 빠진 것 같습니다.”

자금관리팀장이 거래원장을 펼쳤다.

“미도래 어음도 일부만 들어가 있습니다. 가공비와 운송비 정산분도 확인해야 합니다.”


김민철이 물었다.

“우리가 계산한 총액은?”

팀장이 숫자를 읽었다.

법원 자료에 적힌 금액보다 컸다.


어제까지 장부에 표시된 숫자는 외상매출금이었다. 오늘부터 그 숫자는 법원의 절차 안에서 인정받아야 하는 회생채권이 됐다.

같은 금액이었지만 의미가 달라졌다.

외상매출금은 언젠가 돌아올 돈이라는 전제에서 기록된다. 회생채권은 얼마나, 어떤 방식으로, 언제 회수할 수 있을지 다시 계산해야 하는 돈이었다.

김민철은 마지막 납품을 승인한 사람을 찾았다.


영업팀장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마지막 출고 당시 기존 대금이 이미 연체된 상태였나?”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추가로 보냈지?”


영업팀장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현장 납품이 마무리되면 기성금이 들어온다고 했습니다. 원재료 공급을 중단하면 생산이 멈추고, 그러면 기존 미수금도 받을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결제 예정일은 확인했나?”

“확인했습니다.”

“발주처의 기성금 지급 여부도 확인했나?”

“아크트레이솔루션의 설명을 믿었습니다.”


김민철은 그를 질책하지 않았다.

철강 유통시장에서 흔히 일어나는 판단이었다.

기존 대금을 받기 위해 물건을 추가로 공급한다. 새 물량으로 생산을 이어가게 하면 거래처가 매출을 만들고, 그 돈으로 밀린 대금을 갚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납품된 철강재가 매출로 전환되는 동안 또 다른 비용이 발생한다. 임금과 전기료, 금융비용, 운송비가 먼저 빠져나간다. 발주처가 결제를 미루면 신규 공급분까지 미수금에 더해진다.


받아야 할 돈을 회수하려고 철강재를 보냈다.

그 철강재 때문에 받아야 할 돈은 더 늘어났다.


김민철은 영업팀장에게 말했다.

“누가 승인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야. 어떤 근거로 승인했는지가 중요해.”

“앞으로는 기성금 입금 확인서를 받겠습니다.”

“그것만으로 부족해. 발주처에서 돈이 들어와도 우리한테 올 것이라는 보장은 없어.”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매출은 회사 전체의 성과로 기록됐다.

미수금은 자금관리팀의 문제가 됐다.

그리고 거래처가 쓰러지면 마지막 출고를 승인한 사람의 판단만 남았다.


채권자 목록은 공급망 지도였다

오전 회의에는 청람철강과 거래하던 업체들이 하나둘 합류했다.

대한플레이트는 후판 거래명세표를 가져왔다. 세광스틸서비스는 냉연강판과 용융아연도금강판 납품내역, 절단·가공비 청구서를 준비했다.

봉형강 유통업체도 영상회의에 들어왔다.


아크트레이솔루션의 신규 공장과 외부 건설현장에 H형강·일반형강·철근을 공급한 업체였다.

자금관리팀장이 채권자 목록을 화면에 띄웠다.

철강 유통업체와 가공업체, 설비업체, 운송회사, 리스회사, 금융기관이 차례로 나타났다. 이름은 달랐지만 돈이 멈춘 곳은 같았다.


청람철강은 열연을 공급했다.

대한플레이트는 후판을 보냈다.

세광스틸서비스는 냉연강판과 용융아연도금강판을 절단·가공했다.

형강업체는 공장 구조물용 H형강과 일반형강을 납품했고, 철근업체는 증축공사에 들어갈 철근을 공급했다.

설비는 리스로 들여왔다.

제품 운송은 외상으로 맡겼다.


아크트레이솔루션은 생산과 납품을 반복하며 성장했지만, 그 성장을 지탱한 돈은 회사 자본만이 아니었다.

공급업체가 허용한 결제기간도 자금이었다.

60일 외상은 두 달짜리 무담보 대출과 비슷했다. 어음 만기가 90일로 늘어나면 공급업체는 석 달 동안 거래처의 운전자금을 대신 부담하는 셈이었다.

아크트레이솔루션의 매출이 늘어날수록 공급업체가 빌려주는 돈도 늘었다.


김민철은 채권자 목록을 아래로 내렸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군.”


박준호가 말했다.

“이 회사의 성장은 여러 업체의 외상한도를 합쳐 만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채권자 목록은 단순한 미지급금 명단이 아니었다.


어느 업체가 어떤 제품을 공급했는지, 누가 설비를 빌려줬는지, 어떤 금융기관이 담보를 먼저 잡았는지 보여주는 공급망 지도였다.

공장이 돌아갈 때는 서로 보이지 않던 업체들이 현금이 멈추자 한 화면에 모였다.

그리고 그 명단 안에서 담보를 가진 회사와 그렇지 않은 회사의 순서가 갈렸다.



가격이 오른 날

그날 형강시장은 오랜만에 반등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현대제철이 7월 27일부터 H형강 판매가격을 전 규격에서 톤당 5만 원 인상했다. 국산 중소형 H형강 유통가격은 톤당 119만~120만 원으로 올라섰다.

전주보다 3만 원 높은 수준이었다.


다섯 주 만의 반등이었다.

그러나 제강사가 올린 금액이 유통시장에 모두 반영된 것은 아니었다.


영업팀장의 전화가 울렸다.

“중소형 H형강은 120만 원으로 보시면 됩니다.”

거래처 직원의 목소리였다.


영업팀장이 물었다.

“실제 성약도 그 가격에 됩니까?”

“기준은 그렇습니다.”

“현금이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물량을 봐야 합니다.”

“월말 어음이면요?”

“그 조건으로는 가격을 더 받아야 합니다.”


통화를 끝낸 영업팀장이 말했다.

“가격표는 120만 원인데 현금과 외상 사이에 차이가 커지고 있습니다.”


김민철은 채권자 목록에서 형강업체의 이름을 바라봤다.

시장은 톤당 3만 원의 상승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 업체가 아크트레이솔루션에 받지 못한 돈은 가격 상승분과 비교할 수 없는 규모였다.

상품의 호가는 올랐다.


그 상품을 외상으로 판매한 회사의 채권가치는 낮아졌다.

형강 가격에는 상승 근거가 있었다. 제강사의 가격 인상과 유통재고 부담, 추가 인상 가능성이 시장을 떠받쳤다.

동시에 상승을 막는 요인도 있었다.


철스크랩 가격은 톤당 2만 원 이상 내려갔다. 폭염과 집중호우로 건설현장 작업이 늦어졌고 비수기 수요도 약했다.

일반형강 유통가격은 톤당 104만~105만 원 수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앞서 가격이 한 차례 오른 뒤 추가 상승은 제한됐다. ㄷ형강은 엑스트라 차지가 반영되면서 일반 규격보다 높은 가격이 형성됐다.


형강업체 대표가 화면에서 말했다.

“가격은 올려야 합니다. 그런데 물건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동국제강이 인상에 동참하면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호가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거래는 수요가 결정합니다.”


김민철이 물었다.

“요즘 신규 주문은 어떤가요?”

“가격이 더 오르기 전에 사겠다는 주문은 있습니다.”

“결제조건은요?”


대표가 씁쓸하게 웃었다.

“물량보다 먼저 보는 게 결제조건입니다.”

가격 상승기에 들어오는 대량 주문은 매력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모든 주문이 실수요는 아니었다.


일부는 재고 확보였다.

일부는 가격 상승 기대에 따른 투기성 주문이었다.

또 일부는 기존 공급처에서 여신한도가 막힌 업체가 새로운 거래선을 찾는 과정이었다.

가격 인상은 판매 기회이면서 신용위험이 확대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철근은 가격표를 따라가지 않았다

철근시장에서는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제강사가 제시한 가격과 실제 유통가격 사이의 간격이 다시 벌어졌다.

현대제철은 유통향 철근 가격을 톤당 91만7,000원으로 올렸고, 동국제강도 톤당 91만4,000원의 판매가격을 유지했다.

그러나 SD400 10mm 철근의 유통가격은 톤당 86만~87만 원 수준에 머물렀다. 일부 거래에서는 85만 원대 물량까지 나타났다.


형강은 제강사 인상의 일부라도 시장에 반영됐다.

철근은 인상 전 가격으로 다시 밀려가고 있었다.


철근업체 대표가 말했다.

“가격을 낮춘다고 주문이 늘어나는 상황이 아닙니다.”

“현장이 그렇게 안 좋습니까?”

“비가 그치면 폭염입니다. 작업시간이 줄고 공정도 늦어지고 있습니다.”

“제강사 가격과 차이가 너무 큽니다.”

“창고에 물건이 있고 결제일이 돌아오면 고시가격만 보고 버틸 수 없습니다.”

그 업체 역시 아크트레이솔루션에 철근을 공급했다. 신규 공장 증축공사에 들어간 물량이었다.


김민철이 물었다.

“공장 담보가 있으니 괜찮다고 판단한 겁니까?”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담보대출이 실행되면 바로 결제한다고 했습니다.”

“근저당 순위는 확인했습니까?”

대표는 대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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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공된 공장이 있다는 것과 공급업체가 그 공장에서 돈을 회수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선순위 금융기관의 담보권이 있었고, 설비에는 리스회사의 권리가 설정돼 있었다. 임금과 세금, 공사대금 등 먼저 검토해야 할 채무도 있었다.

공장 벽체 안에는 철근이 들어갔다.

그러나 그 철근을 공급한 업체의 이름은 무담보 채권자 명단에 올라갔다.


철근은 콘크리트 안에서 건물을 떠받치고 있었다.

철근대금은 법원의 절차 안에서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누구의 철강재인가

공장에 남아 있는 원재료와 반제품의 소유관계도 문제가 됐다.

청람철강이 공급한 열연 일부는 아직 코일 상태로 남아 있었다. 다른 일부는 절단돼 케이블트레이 소재로 바뀌었다.

세광스틸서비스가 가공한 용융아연도금강판 가운데는 아크트레이솔루션이 직접 구매한 물량도 있었고, 발주업체가 맡긴 사급재도 섞여 있었다.


영업팀장이 물었다.

“사용하지 않은 코일은 우리가 다시 가져오면 안 됩니까?”

자금관리팀장이 대답했다.

“정상적으로 납품돼 소유권이 넘어갔다면 임의로 반출할 수 없습니다.”

“코일번호를 보면 우리 물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잖습니까?”

“우리가 공급했다는 것과 지금도 우리 소유라는 것은 다릅니다.”


이유진이 작업지시서를 펼쳤다.

“사급재는 별도로 확인해야 합니다. 다만 자체 매입재와 같은 창고에 보관돼 있어 코일번호와 발주서를 모두 맞춰야 합니다.”

김민철은 공장 재고를 사진으로만 확인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코일번호, 중량, 입고일, 매입전표와 작업지시서를 대조해야 했다. 반제품은 어느 발주처 물량인지, 선수금이 지급됐는지도 확인해야 했다.

공장에 놓인 철강재는 겉으로 보면 모두 같은 제품이었다.


그러나 법적 지위는 달랐다.

외상으로 판매돼 소유권이 넘어간 원재료가 있었다.

다른 회사가 가공을 맡기며 제공한 사급재가 있었다.

생산을 마쳤지만 출하되지 않은 완제품도 있었다.


가격표에서는 모두 톤당 얼마로 표시됐지만, 법원의 절차 안에서는 누구의 재산인지부터 따져야 했다.

같은 코일이라도 어떤 계약으로 들어왔는지에 따라 운명이 달라졌다.

채권에도 가격이 있었다


오후 회의에는 회생사건을 다루는 변호사가 참석했다.

변호사는 거래명세표와 세금계산서, 받을어음 사본을 차례로 확인했다.

“모든 채권을 한 금액으로 묶어서는 안 됩니다.”


그가 말했다.

“담보가 있는지, 일반 회생채권인지, 절차 개시 이후 발생한 비용인지 구분해야 합니다. 어음도 발행인과 배서인, 만기와 지급 여부를 각각 확인해야 합니다.”


김민철이 물었다.

“상대방이 제출한 목록보다 우리 채권이 많으면 어떻게 합니까?”

“신고기간 안에 정확한 금액과 자료를 제출해야 합니다. 거래명세표, 세금계산서, 납품확인서, 계좌내역을 날짜순으로 정리하는 게 좋습니다.”

“얼마를 돌려받을 수 있습니까?”

“지금은 알 수 없습니다.”

“공장과 설비가 있지 않습니까?”

“그 자산에 누구의 권리가 먼저 설정돼 있는지 봐야 합니다. 회사를 계속 운영할 때의 가치와 청산할 때의 가치도 조사해야 합니다.”


박준호가 물었다.

“회생계획이 인가되면 원금은 전부 받습니까?”

“일부 조정이나 장기 분할상환 가능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구체적인 변제율은 조사와 회생계획안이 나와야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공급업체는 그동안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신규 공급이 필요할 수는 있습니다. 다만 과거 채권과 새 거래를 분리해야 합니다. 현금 결제나 충분한 담보 없이 과거의 신용조건을 그대로 연장해서는 안 됩니다.”


영업팀장이 말했다.

“공장을 다시 돌리려면 철강재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철강재를 넣으려면 돈이 있어야 합니다.”

변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회생하는 회사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공급업체에는 현금이 필요합니다. 두 회사가 가진 시간의 가격이 다른 겁니다.”

김민철은 그 말을 적었다.


채권에도 가격이 있었다.

명목상 원금이 같더라도 언제, 얼마를, 어떤 방식으로 받느냐에 따라 실제 가치는 달라졌다. 5년에 걸쳐 분할상환되는 1억 원은 지금 받을 수 있는 1억 원과 같지 않았다.

톤당 120만 원에 판매한 H형강도 대금 일부가 감면되고 수년 뒤에 지급된다면, 현금으로 톤당 110만 원에 판매한 거래보다 나쁠 수 있었다.


철강재에는 세금계산서에 적히는 가격이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회수되는 가격이 따로 있었다.



다시 줄어드는 여신한도

청람철강은 그날 오후 모든 거래처의 여신한도를 재심사했다.

최근 석 달 동안 결제가 두 차례 이상 지연된 업체가 먼저 분류됐다. 현금 결제를 어음으로 바꾼 업체, 어음 만기가 길어진 업체, 매출 증가율보다 재고 증가율이 높은 업체도 점검대상에 들어갔다.

신규 공장과 설비를 증설한 거래처도 예외가 아니었다.


영업팀장이 한 업체를 가리켰다.

“이 회사는 매출이 전년보다 40% 늘었습니다.”


김민철이 물었다.

“영업현금흐름도 늘었나?”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재고는?”

“매출보다 빠르게 증가했습니다.”

“외상한도는?”

“매출 증가에 맞춰 두 번 올렸습니다.”

“원래 수준으로 줄여.”


영업팀장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우량 거래처입니다.”

“매출이 크다는 것과 현금이 있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야.”

다른 거래처에서는 H형강 주문이 갑자기 늘었다.


현대제철의 가격 인상 이후 추가 상승을 예상해 물량을 확보하려는 주문이었다.

“최근 결제는 어땠지?”

“예정보다 12일 늦었습니다.”

“절반만 출고하고 나머지는 현금으로 전환해.”

“물량을 줄이면 다른 유통업체로 갈 수 있습니다.”


김민철이 말했다.

“보내면 매출은 된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돌아와야 현금이 된다.”

가격이 오를 때 영업팀은 판매 기회를 본다.


자금팀은 더 많은 돈이 거래처 창고에 묶이는 상황을 본다.

가격이 내릴 때 영업팀은 재고 처분을 위해 결제조건을 완화하려 한다.

자금팀은 가격과 신용을 동시에 양보할 때 발생할 손실을 계산한다.


강세장과 약세장의 위험은 달랐지만, 외상거래가 남기는 질문은 같았다.

이 물량은 누구에게 팔리는가.

그 회사는 무엇으로 대금을 갚는가.

그리고 그 돈은 언제 돌아오는가.



장부에 남은 성장

다음 날 청람철강은 회생채권 신고금액을 확정했다.

외상매출금과 미도래 받을어음을 분리했다. 운송비와 가공 관련 비용도 계약별로 다시 나눴다.


자금관리팀장이 최종표를 김민철에게 건넸다.

“상대방 목록보다 금액이 큰 이유를 모두 설명할 수 있나?”

“마지막 출고분과 일부 미도래 어음이 빠져 있습니다. 관련 서류를 붙였습니다.”

“추정한 금액은 없지?”

“확인된 거래만 반영했습니다.”

“피해액이라고 쓰지 마.”


김민철이 말했다.

“아직 회수하지 못한 채권액이다. 최종 손실은 아니다.”

일부는 어음 발행인이나 보증을 통해 회수될 수 있었다. 회생계획에 따라 일정 부분을 돌려받을 수도 있었다.

반대로 신고한 채권이 모두 인정되더라도 돈이 들어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었다.


김민철은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그날 저녁 그는 아크트레이솔루션의 과거 재무자료를 다시 펼쳤다.

매출은 해마다 증가했다.

공장은 넓어졌다.

직원과 설비도 늘었다.

거래처 수와 납품현장도 확대됐다.

손익계산서만 보면 성장하는 회사였다.


그러나 현금흐름표에는 다른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재고자산이 늘었다.

매출채권 회수기간이 길어졌다.

차입금과 리스부채가 증가했다.

매입채무도 함께 불어났다.

매출이 늘수록 필요한 운전자금이 커졌다. 부족한 돈은 금융기관 대출과 공급업체의 외상기간으로 메웠다.


청람철강은 열연을 판매한 것이면서 동시에 신용을 제공했다.

대한플레이트는 후판으로 자금을 빌려줬다.

세광스틸서비스는 냉연강판과 용융아연도금강판, 가공비의 형태로 신용을 제공했다.

형강업체와 철근업체도 제품을 납품하며 무담보 금융을 공급했다.

아크트레이솔루션의 성장은 공장에만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성장의 일부는 공급업체 장부의 외상매출금으로 남아 있었다.



두 장의 숫자

김민철은 책상 위에 두 장의 자료를 펼쳤다.

한 장에는 7월 다섯째 주 봉형강시장 가격이 정리돼 있었다.


국산 중소형 H형강은 톤당 119만~120만 원이었다. 제강사의 5만 원 인상 가운데 시장이 받아들인 것은 약 3만 원이었다.

일반형강은 톤당 104만~105만 원에서 추가 상승을 멈췄다.

철근은 톤당 86만~87만 원이었고 일부 저가 물량은 85만 원대에 나타났다. 제강사가 제시한 가격과 실제 유통가격 사이에는 여전히 큰 간격이 있었다.


다른 한 장은 아크트레이솔루션의 회생채권자 목록이었다.

가격표에서는 H형강이 올랐고 철근이 약해졌다.


채권자 목록에서는 열연과 후판, 냉연강판, 용융아연도금강판, H형강과 철근이 모두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현금에서 멀어지는 방향이었다.


김민철은 시장가격표를 서랍에 넣었다.

채권자 목록은 책상 위에 남겨뒀다.

창밖으로 철강재를 실은 화물차가 지나갔다.

예전 같으면 그는 적재된 물량과 판매가격부터 계산했을 것이다.


이제는 달랐다.

그 물량이 어디로 가는지, 결제조건은 무엇인지, 대금이 어떤 자금에서 나오는지를 먼저 생각했다.

그해 여름 H형강 가격은 다섯 주 만에 반등했다.


그러나 철강 유통업체의 여신한도는 오히려 낮아졌다.

가격은 제강사가 올릴 수 있었다.

수요가 약하면 시장이 밀어냈다.

신용이 무너지면 가격표의 숫자는 법원 안에서 다시 계산됐다.



이번 회차의 시장 메모

7월 다섯째 주 봉형강시장은 제품별로 다른 방향을 보였다.

중소형 H형강은 제강사의 가격 인상으로 톤당 119만~120만 원까지 반등했지만, 원료가격 하락과 건설수요 부진으로 인상분 전부를 반영하지는 못했다. 일반형강은 앞선 상승 이후 톤당 104만~105만 원에서 움직임이 제한됐다.


철근은 제강사의 판매가격과 유통가격 사이의 간격이 확대됐다. SD400 10mm 기준 유통가격은 톤당 86만~87만 원이었으며, 일부 저가 물량은 85만 원대까지 내려갔다.

그러나 유통업체가 실제로 확인해야 할 것은 가격 방향만이 아니다.


가격 상승기에 갑자기 늘어나는 주문이 실수요인지, 재고 확보인지, 기존 공급처에서 여신이 막힌 업체의 주문인지 구분해야 한다.

가격 약세기에는 재고를 줄이기 위해 판매가격과 결제조건을 동시에 양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판매가격이 높더라도 대금 회수가 늦거나 일부가 손실되면 실질 거래가격은 현금 판매보다 낮아질 수 있다.

시장이 약해질수록 판매량보다 회수 가능성을 먼저 계산해야 한다.



작품 안내

이 작품은 실제 철강시장의 가격과 수급 변화를 모티프로 창작한 산업소설이다. 등장하는 인물과 일부 기업·사건은 허구이며 실제 기업·단체·사건과 관련이 없다. 작품에 포함된 회생·채권 관련 내용은 서사를 위한 일반적인 설명으로, 실제 사건에서는 계약관계와 법원 결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다음 회 예고
강철의 계절⑬ — 현금으로만 팝니다

아크트레이솔루션의 회생 신청 이후 청람철강은 거래처 여신한도를 줄이고 현금 판매를 확대한다.

출고조건이 강화되자 자금력이 약한 가공업체와 건설자재업체들이 물량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다. 일부 업체는 현금 결제를 조건으로 가격 인하를 요구하고, 다른 업체는 제3자가 발행한 어음을 들고 새로운 공급선을 찾아다닌다.


H형강은 톤당 120만 원의 벽 앞에서 멈추고, 철근 저가 물량은 85만 원 아래를 위협한다.

가격을 지키려는 제강사, 현금을 지키려는 유통업체, 공사를 멈출 수 없는 수요업체의 이해가 충돌한다.

그때 청람철강에 평소 거래가 없던 업체로부터 대규모 현금 주문이 들어온다.

주문가격도 좋고 입금도 빨랐다.

그러나 송금인 명의에는 아크트레이솔루션과 연결된 낯익은 회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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