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길
박동수
잉크가 엎질러진 밤의 배꼽을 파헤친다
어제 죽은 문장들이 손톱 밑에 검게 고여 있다
문장은 늘 허기보다 늦게 도착하고
나는 식어버린 낱말의 온도를 재기 위해
혀끝 위에 얼음 조각 같은 비유를 올린다
사물들은 제 이름을 찾기 위해 몸을 비틀고
나는 그 비명 소리를 채집하여
행과 연이라는 좁은 감옥에 가둔다
무구한 흰 종이 위로
눈먼 새의 발자국 같은 행간이 지나갈 때
비로소 나는 내가 쓴 글자에 걸려 넘어진다
끝내 닿지 못한 마침표 하나가
캄캄한 허공에 박혀 지지 않는 별이 된다

박동수 시인은 철강인이다. 포스코에서 32년 동안 근무했고, 회사를 나온 뒤에는 몇 년간 철강 유통 현장에서 다시 쇠와 시장을 마주했다. 제철소의 거대한 설비와 뜨거운 철강재, 납기와 가격, 거래처와 사람 사이를 오래 걸어온 그가 이제는 시인의 길을 걷고 있다.
그러나 그의 삶에서 철강과 시는 서로 멀리 떨어진 두 세계가 아니다. 하나는 쇠를 다루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를 다루는 일이지만, 그 안에는 불필요한 것을 걷어내고 본질을 남긴다는 공통점이 있다.
광석이 곧바로 강철이 되지 않듯,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도 곧바로 시가 되지 않는다. 쇳물에서 불순물을 걷어내고 성분을 맞추듯 시인은 기억과 감정 속에서 필요한 낱말을 골라낸다. 뜨거운 철강재가 압연과 냉각을 거쳐 형태를 얻듯, 거친 감정도 침묵과 퇴고를 지나 한 편의 시가 된다.
“어제 죽은 문장들이 손톱 밑에 검게 고여 있다”는 구절에서는 현장의 흔적이 느껴진다. 오랜 세월 철강 현장을 지킨 사람의 손톱 밑에는 쇳가루와 기름때가 남는다. 이제 시인의 손톱 밑에는 끝내 선택되지 못한 문장과 지워진 낱말이 남아 있다.
철강인이던 그는 온도를 읽는 데 익숙했을 것이다. 쇠는 온도에 따라 성질이 달라지고, 지나치게 뜨겁거나 차가우면 원하는 품질을 얻기 어렵다. 시인은 이제 “식어버린 낱말의 온도”를 잰다. 쇠의 온도를 살피던 눈으로 사람의 마음과 기억, 언어의 온도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제철소에서는 작은 균열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표면 아래 숨어 있는 결함이 훗날 더 큰 파손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시 또한 마음속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상처와 후회, 외로움과 그리움이 흰 종이 앞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비로소 나는 내가 쓴 글자에 걸려 넘어진다”는 고백은 창작의 고독을 보여준다. 시인은 언어를 지배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써놓은 문장 앞에서 멈추고, 걸려 넘어지며, 스스로를 다시 바라보는 사람이다.
박동수 시인이 걸어온 철강인의 길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포스코에서 보낸 32년, 철강 유통 현장에서 보낸 몇 년은 수많은 선택과 책임의 시간이었다. 생산과 품질, 가격과 납기, 조직과 거래처 사이에서 언제나 완전한 답을 얻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철강시장에도 끝내 찍지 못한 마침표가 있다. 거래가 끝나도 관계가 남고, 회사를 떠나도 현장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철강인은 퇴직한 뒤에도 용광로의 빛과 압연기의 진동, 새벽 출하장의 공기를 오래 기억한다.
시인은 그 기억을 언어로 다시 불러낸다.
한때 쇠의 성분과 품질을 살피던 사람이 이제는 낱말의 무게와 문장의 결을 살핀다. 과거에는 강재가 어디에 쓰일지를 고민했다면, 이제는 한 편의 시가 누구의 마음에 닿을지를 생각한다.
쇠는 건물과 교량을 지탱하고, 문장은 사람의 내면을 지탱한다. 좋은 강철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하중을 견디듯, 좋은 시도 누군가의 마음 깊은 곳에 조용히 남아 삶의 무게를 받쳐준다.
박동수 시인의 삶은 퇴직 이후의 시간이 단순한 은퇴가 아니라 또 다른 제련의 과정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오랜 현장 경험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불 속으로 들어가 다른 형태를 얻는다.
쇠를 만들던 사람은 이제 문장을 벼린다. 제철소를 떠났지만 제련은 끝나지 않았다. 다만 그가 다루는 재료가 광석과 쇳물에서 기억과 언어로 바뀌었을 뿐이다.
시인이 말한 “끝내 닿지 못한 마침표”는 실패가 아니다. 아직 걸어갈 길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철강인 박동수에게 시는 인생의 마지막 공정이 아니라, 다시 시작된 새로운 압연라인인지도 모른다.
그의 문장들은 오랜 세월 불과 쇠 곁에서 살아온 한 사람의 내면을 통과해 세상으로 나온다. 그래서 그 시에는 쉽게 식지 않는 현장의 온도와, 오래 견딘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고독의 깊이가 함께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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