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8월 06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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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계절(13) — 바다 위의 싼 코일



가격은 아직 내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시장은 이미 싼 코일이 도착한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도착하지 않은 물량이 먼저 가격을 내렸다

월요일 오전 8시 40분, 청람철강 영업회의가 시작됐다.

회의실 화면에는 지난주와 거의 같은 가격이 떠 있었다.

국산 열연강판 정품은 톤당 96만 원, 수입대응재는 94만~95만 원, 수입재는 92만~93만 원이었다. 후판도 국산 100만 원, 수입재 96만~97만 원 선을 유지했다.

가격표만 보면 시장은 조용했다.


하지만 박준호가 들고 온 거래처별 협상 기록은 달랐다. 월요일 오전에만 네 곳에서 가격 인하 요청이 들어왔다.

“동남아산 열연이 540달러에 나온다는데 국산을 96만 원에 살 이유가 있습니까?”

“환율도 내려왔는데 기존 가격을 그대로 받는 건 너무한 것 아닙니까?”

“9월에 수입재가 들어오면 80만 원대로 떨어질 텐데, 지금 사려면 최소한 톤당 3만 원은 빼줘야 합니다.”


아직 계약도 체결되지 않은 물량이었다. 선박에 실렸는지도 확인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국내 창고에 쌓인 코일의 가격부터 흔들었다.

박준호가 말했다.

“실수요업체들이 수입 오퍼를 기준으로 견적을 다시 달라고 합니다. 일부는 이번 주 구매량을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합니다.”

영업팀장이 덧붙였다.

“경쟁사는 수입대응재를 93만 원까지 제시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김민철은 화면의 가격표를 보지 않고 거래처별 주문량을 살폈다.

“실제로 540달러에 계약했다는 업체가 있나?”

“확인된 곳은 없습니다.”

“그럼 선적 가능한 물량이라는 증거는?”

“오퍼 시트가 몇 장 돌고 있습니다.”

“제철소가 어디지?”


박준호가 대답하지 못했다.

열연강판이 톤당 540달러 CFR에 제시됐다는 말은 빠르게 퍼졌지만 어느 제철소가 생산하고, 언제 선적하며, 어떤 규격을 공급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가격만 시장에 도착했다.

코일은 아직 바다 건너편에 있었다.




한 장의 오퍼가 재고의 값을 바꿨다

회의가 끝난 뒤 자금관리팀장은 청람철강의 열연 재고표를 김민철에게 내밀었다.


현재 보유량은 2,640톤이었다. 평균 매입원가는 운송비를 제외하고 톤당 92만 원대였다. 대부분 최근 두 달 사이 확보한 국산 정품과 수입대응재였다.

“현 시세로는 손실 재고가 아닙니다.”

“그런데?”

“판매 속도가 문제입니다. 지난달에는 월 1,800톤을 출고했는데 이번 달 예상량은 1,200톤에도 못 미칩니다.”

“현재 속도면 두 달 이상 걸리겠군.”

“수입재가 9월이나 10월에 들어오면 그 전에 줄여야 합니다.”


가격이 유지되더라도 재고가 오래 머물면 금융비용이 붙었다. 창고료와 상하차비도 누적됐다. 얇은 규격과 선호도가 낮은 폭은 시간이 지날수록 판매가 어려워졌다.

회계상 재고가격은 그대로였다. 시장이 기대하는 미래가격은 이미 낮아지고 있었다.


김민철이 물었다.

“지금 2만 원을 낮추면 얼마나 빨리 팔 수 있지?”

“가격만 낮춘다고 물량이 바로 나가지는 않을 겁니다. 수요가들이 필요량 이상을 사지 않습니다.”

“그럼 가격을 지키면?”

“마진은 유지되지만 재고가 남습니다.”

“수입계약을 하지 않으면?”

“경쟁사가 먼저 계약해 낮은 원가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계약하면?”

“현재 재고와 새로 들어올 재고가 겹칠 수 있습니다.”


판단해야 할 것은 다음 주 가격이 아니었다.

두 달 뒤 재고의 모양이었다.

가격이 내려갈 것으로 예상되면 유통업체는 현재 재고를 줄여야 했다. 그러나 판매량이 감소한 상태에서 재고를 처분하려면 가격이나 결제조건을 양보해야 했다.


반대로 수입계약을 미루면 낮은 원가의 물량을 확보할 기회를 놓칠 수 있었다.

국내 재고를 먼저 팔 것인가.
새로운 수입재를 먼저 계약할 것인가.

두 선택 모두 위험했다.




2,500톤의 계약서

오후 2시, 박준호는 이메일 한 통을 받았다.

발신자는 ‘오션브리지 메탈’이었다. 싱가포르에 본사를 두고 동남아시아 철강재를 중개한다는 무역회사였다. 청람철강과 직접 거래한 적은 없었지만 국내 업체 몇 곳에 열연강판을 공급했다는 소개가 붙어 있었다.


제안 물량은 열연강판 2,500톤이었다.

가격은 톤당 536달러 CFR 한국이었다. 결제조건은 계약금 10%, 선적서류 사본 제시 후 잔금 90% 송금이었다. 선적은 계약 후 25일 이내, 한국 도착은 선적 후 7~10일로 적혀 있었다.


최근 시장에서 돌던 540달러 안팎보다도 낮았다.

박준호는 원화 환산표를 만들었다.

환율을 달러당 1,440원으로 적용하면 단순 환산가격은 톤당 약 77만2,000원이었다. 통관비, 금융비용, 하역비, 국내 운송비 등을 더해도 국산 유통가격과 상당한 차이가 남았다.


2,500톤을 전량 판매할 수 있다면 기존 국산 재고보다 높은 마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박준호가 계약서를 들고 김민철에게 갔다.

“조건이 좋습니다.”


김민철은 지난번 동해산업자재 주문 때와 같은 질문을 했다.

“왜 우리한테 왔지?”

“국내 고객을 늘리는 중이라고 합니다. 첫 거래라 특별가격을 제시했다고 합니다.”

“제철소는?”

“메콩스틸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어느 나라지?”

“베트남입니다.”

“선적항은?”


박준호가 계약서를 내려다봤다.

“포트클랑입니다.”

김민철이 고개를 들었다.

포트클랑은 말레이시아의 주요 항만이었다. 베트남에서 생산한 열연강판을 말레이시아로 옮겨 다시 한국으로 수출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직선적인 거래는 아니었다.

“메콩스틸의 생산공장은 어디라고 돼 있지?”

“붕따우 인근이라고 합니다.”

“베트남 남부에서 생산한 코일을 왜 말레이시아로 보내 선적하지?”

박준호는 즉시 답하지 못했다.

계약서의 가격은 자세했지만 물류 경로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선적항과 제철소가 맞지 않았다

이유진은 오션브리지 메탈이 보내온 서류를 하나씩 확인했다.

상업송장 견본, 포장명세서 견본, 품질증명서 사본, 제철소 소개자료가 첨부돼 있었다.

품질증명서에는 제철소의 영문명이 적혀 있었고 화학성분과 인장강도, 코일 번호도 기재돼 있었다. 얼핏 보면 정상적인 밀시트였다.


그러나 이유진은 문서 하단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이 밀시트, 발행일이 4개월 전입니다.”

박준호가 말했다.

“견본이니까 과거 서류를 보낸 것 아닐까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코일 규격이 이번 계약과 거의 같습니다.”

“보유재고일 수도 있지.”

“계약서에는 신규 생산품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계약 대상은 2.0~6.0mm 열연강판이었다. 밀시트 견본의 규격도 일치했다. 단순한 양식 견본이라기보다 이미 생산된 물량의 서류에 가까웠다.

이유진은 문서에 적힌 제철소 연락처로 이메일을 보냈다. 메콩스틸이 오션브리지 메탈에 한국향 판매권한을 부여했는지, 제시된 밀시트가 실제 발행된 것인지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두 시간 뒤 회신이 왔다.

메콩스틸은 비슷한 이름을 사용하는 회사가 여러 곳이므로 법인명과 공장 주소를 정확히 알려달라고 했다. 첨부된 밀시트 번호는 자사의 발행번호 체계와 일치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이유진은 다시 제철소 소개자료를 살폈다.

회사 로고는 있었지만 법인등록번호가 없었다. 웹사이트 주소는 실제 제철소가 아니라 무역회사의 홍보 페이지로 연결됐다. 공장 사진 가운데 한 장은 다른 나라 제철소의 압연라인을 좌우로 뒤집은 이미지처럼 보였다.


박준호의 표정이 굳었다.

“그럼 가짜 제철소라는 겁니까?”

“아직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계약서의 생산자와 밀시트 발행자가 같은 회사인지 확인되지 않습니다.”


김민철이 물었다.

“오션브리지 측에는 뭐라고 하나?”

“트레이더를 통해 확보한 재고라 생산자 정보 공개에 제한이 있다고 합니다.”

“계약서에는 신규 생산품이라고 했잖아.”

“한국 구매자가 요구하면 선적 후 원본 밀시트를 제공하겠다고 합니다.”

“선적 후?”

“계약금은 그 전에 보내야 합니다.”


지난 회차에서 청람철강은 이름이 다른 현금을 돌려보냈다.

이번에는 실체가 확인되지 않은 코일에 먼저 돈을 보내야 했다.




싼 가격에는 설명이 부족했다

오션브리지 메탈의 한국 담당자는 화상회의에서 거래 구조를 설명했다.

“물량은 베트남 제철소에서 생산하지만 말레이시아 보세구역에 있는 계열 물류회사를 통해 선적합니다. 여러 고객의 물량을 모아 운임을 낮추는 방식입니다.”


김민철이 물었다.

“현재 코일은 어디에 있습니까?”

“일부는 생산됐고 일부는 생산 예정입니다.”

“생산된 물량의 코일 번호를 보내주십시오.”

“계약이 체결되기 전에는 공개하기 어렵습니다.”

“포트클랑까지 이동했다는 운송서류가 있습니까?”

“선적 전에 제공할 수 있습니다.”

“제철소와 귀사 사이의 공급계약은요?”

“상업상 비밀입니다.”

“메콩스틸이 귀사에 판매권한을 줬다는 확인서는 받을 수 있습니까?”


담당자는 잠시 말을 멈췄다.

“가격이 워낙 낮아서 다른 구매자들도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오늘 중 계약하지 않으면 물량을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박준호는 그 말을 이미 여러 번 들어봤다.

싸게 나온 스크랩, 긴급 처분하는 빌렛, 선복이 취소돼 할인한다는 열연강판에는 늘 결정 시한이 짧았다.

구매자가 서류를 확인할 시간을 줄수록 판매자는 가격을 더 강조했다.


김민철은 가격에 관해 묻지 않았다.

“원산지증명서는 어느 기관에서 발행합니까?”

“말레이시아에서 발급될 예정입니다.”

“베트남산 철강재인데 말레이시아 원산지증명서를 발급합니까?”

“말레이시아를 경유하므로 현지 파트너가 처리합니다.”

“경유와 원산지는 다른 문제입니다.”


담당자는 물류구조가 복잡해 실무부서에 확인해야 한다고 답했다.

“원산지를 베트남으로 신고할 겁니까, 말레이시아로 신고할 겁니까?”

“통관에 문제가 없는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그 방식이 무엇입니까?”

명확한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화상회의가 끝난 뒤 박준호가 말했다.

“가격만 보면 놓치기 아까운 계약입니다.”


김민철이 대답했다.

“그래서 설명이 더 필요해.”

“정상 물량인데 우리가 지나치게 의심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 있지.”

“다른 업체가 계약하면 우리는 낮은 원가를 확보하지 못합니다.”

“정상 물량이라는 걸 확인한 뒤 계약하면 돼.”

“그사이에 팔릴 수 있습니다.”


김민철은 계약서 첫 장에 표시된 가격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 가격은 우리를 서두르게 만들고 있어. 그런데 코일은 서두르지 않고 있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잖아.”




MIP 아래에서 달라진 원산지의 값

이유진은 중국산과 베트남산 열연강판의 한국향 거래조건을 비교했다.

중국산 일반 수출 오퍼는 톤당 500달러 안팎 FOB에서 형성됐지만 한국향은 가격약속 때문에 570달러대가 제시되고 있었다. 베트남산은 약 540달러 CFR 수준이었다.


두 가격의 차이는 단순한 생산원가 차이가 아니었다.

어느 나라에서 생산됐는지에 따라 한국에 들어올 수 있는 가격과 통상비용이 달라졌다. 중국산 열연강판을 베트남 또는 말레이시아산으로 신고한다면 낮은 오퍼를 만들 수 있었지만, 원산지 검증에서 문제가 생길 경우 추징과 통관 지연, 거래처 클레임이 뒤따를 수 있었다.

품질이 같아도 원산지가 달라지면 가격이 달라지는 시장이었다.


박준호가 말했다.

“혹시 중국산 코일을 제3국에서 환적하는 구조 아닐까요?”


이유진이 답했다.

“가능성은 있지만 자료 없이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 베트남 생산품일 수도 있고, 말레이시아 보세창고에 보관된 재고일 수도 있습니다.”

“확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철소의 생산확인서, 코일별 밀시트, 베트남에서 말레이시아로 이동한 선하증권, 보세창고 입고기록이 필요합니다. 원산지증명서의 발급국과 생산국도 일치하는지 봐야 합니다.”

“그걸 전부 요구하면 판매자가 거래를 포기할 겁니다.”

“그러면 가격이 싼 이유를 끝까지 모르는 상태로 계약하게 됩니다.”


수입계약에서 가격은 계약서 첫 장에 있었다.

위험은 첨부서류와 예외조항, 물류 경로 사이에 흩어져 있었다.




국산 재고를 먼저 팔아야 하는가

수입계약 검토가 길어지는 동안 국내 거래처들의 가격 인하 요구는 계속됐다.

대성가공은 열연강판 220톤을 주문하면서 톤당 93만 원을 제시했다. 기존 거래가격보다 2만 원 이상 낮았다.

“베트남산이 540달러입니다. 두 달만 기다리면 훨씬 싸게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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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호가 물었다.

“두 달 동안 필요한 물량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최소한만 사야죠.”

“그럼 220톤 전량이 아니라 이번 달 실제 투입분만 구매하십시오.”



대성가공은 주문량을 80톤으로 줄였다.

다른 업체도 비슷했다. 가격이 내려갈 것이라는 기대가 생기자 필요한 만큼만 구매했다. 유통업체가 가격을 낮춰도 수요가 크게 늘지 않았다.

시장 전체의 재고가 많지 않아도 수요업체가 구매를 늦추면 유통업체 창고의 회전은 느려졌다.


영업팀장은 톤당 1만5,000원의 특별할인을 제안했다.

“수입재가 들어오기 전에 1,000톤 정도는 줄여야 합니다.”

자금관리팀장은 반대했다.

“전 거래처에 가격을 낮추면 기존 재고 전량의 평가기준이 내려갑니다. 외상 60일까지 허용하면 할인액보다 금융비용과 회수위험이 더 커질 수 있습니다.”


김민철은 두 의견을 절충했다.

현금 결제와 30일 이내 결제 거래처에는 제한적인 할인을 적용하되 장기 외상거래에는 가격을 유지하기로 했다. 회전이 느린 규격은 별도 가격으로 처분하고, 수요가 꾸준한 규격은 급하게 낮추지 않기로 했다.

수입재가 싸다고 모든 국산 재고의 값을 동시에 내릴 필요는 없었다.

재고에는 각기 다른 시간이 붙어 있었다.

이번 주에 팔리는 코일과 두 달 뒤까지 남을 코일의 가격은 같을 수 없었다.




선하증권 사본이 도착했다

수요일 오후, 오션브리지 메탈은 선하증권 사본을 보내왔다.

판매자는 계약을 서두르게 하려고 일부 물량이 이미 포트클랑으로 이동했다고 주장했다. 선하증권에는 열연강판 코일 1,180톤이 기재돼 있었다.


박준호는 안도했다.

“물량은 실제로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유진은 문서의 날짜를 확인했다.

선적일은 계약 제안을 받기 3주 전이었다. 도착지는 한국이 아니라 필리핀 마닐라였다. 화물 설명에는 열연강판이 아니라 ‘철강제품’이라는 포괄적인 표현만 적혀 있었다.


송하인은 메콩스틸이 아니었다. 중국 남부의 한 무역회사였다.

“이 서류는 우리 계약물량을 증명하지 못합니다.”


박준호가 말했다.

“필리핀행 물량을 한국으로 돌리는 것 아닐까요?”

“그렇다면 선하증권 변경과 매매계약 변경 기록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송하인이 중국 회사입니다.”

“중국 트레이더가 베트남산을 판매할 수도 있잖습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산자는 베트남, 송하인은 중국, 선적항은 말레이시아, 기존 도착지는 필리핀입니다. 네 나라를 연결하는 서류가 하나도 없습니다.”


김민철은 오션브리지 측에 원본 선하증권의 검증 가능한 사본과 컨테이너 또는 코일 번호, 보세창고 확인서를 요청했다.

한 시간 뒤 답변이 왔다.

해당 선하증권은 물류구조를 보여주기 위한 참고자료이며 실제 계약물량의 서류가 아니라는 설명이었다.


김민철이 말했다.

“우리는 계약물량을 물었는데 저쪽은 비슷한 물량의 서류를 보냈어.”

“계약금만 보내면 정확한 서류를 주겠다고 합니다.”

“정확한 물건이 있는지 확인하려고 서류를 달라는 건데, 돈을 먼저 보내야 정확한 서류를 준다는 거군.”


계약금은 전체 대금의 10%였다.

약 13만4,000달러였다. 원화로 1억9,000만 원이 넘었다.

물량이 실제 존재하지 않거나 계약 상대방이 판매권한을 갖지 않았다면 돌려받기 어려운 돈이었다.




가장 싼 오퍼가 가장 비싼 계약이 되는 순간

청람철강은 외부 검사기관을 통해 선적 전 검사와 재고 실사를 진행하겠다고 제안했다. 검사기관이 코일 번호, 중량, 규격, 표면 상태와 밀시트를 대조한 뒤 계약금을 지급하는 조건이었다.


오션브리지 측은 비용 문제를 이유로 거절했다.

청람철강이 검사비를 부담하겠다고 하자 이번에는 보세창고의 보안규정을 들었다. 검사기관의 출입이 어렵다는 설명이었다.

그다음에는 물량이 아직 여러 창고에 분산돼 있어 한 번에 확인할 수 없다고 했다.


설명이 바뀔수록 가격은 더 낮아졌다.

“오늘 계약하면 532달러까지 가능합니다.”

국내 유통가격보다 20만 원 이상 낮게 계산되는 수준이었다.


박준호는 흔들렸다.

정상적인 물량이라면 청람철강의 손익을 바꿀 수 있는 계약이었다. 기존 재고에서 손실을 보더라도 신규 수입재의 마진으로 만회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민철은 가격을 낮춘 이유를 다르게 해석했다.

“서류를 보완하는 대신 가격을 내리고 있어.”

“재고를 급하게 처분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보유재고를 보여주면 돼.”

“트레이더가 거래선을 공개하기 싫은 것 아닐까요?”

“거래선은 감출 수 있어. 물건까지 감출 이유는 없지.”


자금관리팀장이 계약서의 분쟁해결 조항을 확인했다. 분쟁 발생 시 중재지는 계약 상대방의 등록국이 아니라 제3국으로 적혀 있었다. 계약금 반환 조건은 없었고, 구매자가 잔금을 지급하지 않으면 계약금 전액이 몰취되는 구조였다.

반면 판매자가 선적기한을 지키지 못할 경우 책임은 ‘합리적인 기간 연장’으로 제한돼 있었다.


구매자는 돈을 늦게 보내면 계약금을 잃었다.

판매자는 물건을 늦게 보내도 시간을 더 얻었다.

싸게 보이는 가격의 반대편에 불균형한 조건이 붙어 있었다.

김민철은 계약을 중단했다.




실제 코일은 다른 곳에서 나타났다

이틀 뒤 청람철강과 오랫동안 거래해 온 수입상에게서 전화가 왔다.

“혹시 포트클랑 선적 열연 오퍼를 받으셨습니까?”


김민철이 물었다.

“왜 묻습니까?”

“국내 여러 업체에 같은 물량이 제시됐습니다. 물량도 모두 2,500톤입니다.”

“가격은?”

“업체마다 532~540달러입니다.”

“제철소는 메콩스틸이라고 합니까?”

“어떤 곳에는 베트남산이라고 했고, 다른 곳에는 말레이시아산이라고 했습니다.”


동일한 물량이 여러 구매자에게 동시에 제시되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수입상은 해당 코일로 추정되는 물량이 실제로는 중국에서 생산돼 필리핀으로 판매됐다가 구매자의 신용장 개설이 지연되면서 계약이 중단된 재고라는 정보를 전했다.


확정된 사실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션브리지 측이 제시한 선하증권의 송하인이 중국 회사였고 최초 도착지가 마닐라였다는 점과 맞아떨어졌다.

코일이 실제로 존재할 가능성은 있었다.

다만 생산국과 소유자, 판매권한, 현재 위치가 계약서의 설명과 달랐다.


박준호가 말했다.

“완전히 없는 물건은 아니었군요.”

김민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더 위험할 수 있어.”

“물건이 있으면 계약구조를 고쳐서 살 수 있지 않습니까?”

“누구에게서 사야 하는지부터 확인해야지. 소유권이 없는 회사에 돈을 보내면 코일이 실제로 있어도 우리 물건이 되지 않아.”


철강 수입거래에서 가장 위험한 경우는 언제나 존재하지 않는 물량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존재하지만 판매자가 처분할 권리가 없는 물량, 다른 구매자와 계약된 물량, 은행이나 물류회사가 권리를 보유한 물량도 있었다.

코일의 존재와 소유권은 서로 다른 사실이었다.




수입가격은 내려왔지만 계약 기준은 높아졌다

청람철강은 새로운 수입계약 검토표를 만들었다.

가격과 환율만 입력하던 기존 양식에 생산자, 실제 판매자, 선적항, 원산지증명서 발급기관, 밀시트 검증 여부, 선적 전 검사, 선하증권 발행인, 계약금 반환 조건을 추가했다.


표가 길어지자 박준호가 말했다.

“이렇게 검토하면 빠르게 움직이기 어렵습니다.”



김민철이 답했다.

“수입계약은 빨리 체결하는 경쟁이기도 하지만 잘못된 물량을 피하는 경쟁이기도 해.”

“정상적인 판매자도 이런 요구를 부담스러워할 겁니다.”

“첫 거래와 반복 거래의 기준을 다르게 하면 돼. 거래이력이 쌓이면 절차를 줄일 수 있어.”

“가격이 오르면 결국 비싸게 사게 됩니다.”

“검증비용은 원가야.”


국내 유통업체들은 수입재 도착원가를 계산할 때 오퍼가격, 환율, 운임과 통관비를 주로 봤다.

그러나 처음 거래하는 상대방이라면 다른 비용도 들어갔다.

검사비, 서류검증비, 자금이 묶이는 기간, 통관 지연 가능성, 품질 클레임, 원산지 사후검증 위험이었다.

이 비용을 빼고 계산한 도착원가는 실제 원가가 아니었다.




결말 — 가격만 먼저 상륙했다

8월 첫째 주가 끝날 때까지 동남아산 열연강판은 청람철강 창고에 들어오지 않았다.

국내 열연강판 가격도 크게 내려가지 않았다.

그런데 거래량은 줄었다.


수요업체들은 낮은 수입 오퍼를 근거로 구매를 늦췄고, 유통업체들은 기존 재고를 줄이려 가격과 결제조건을 조정했다. 실제 통관물량이 늘어나기 전부터 시장의 협상 기준이 달라졌다.


금요일 저녁, 박준호는 오션브리지 메탈이 보낸 마지막 이메일을 열었다.

‘최종 제안 530달러. 금일 자정까지 계약금 미입금 시 오퍼 자동 취소.’

그는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 메일을 닫았다.

계약하지 않은 코일의 가격은 계속 내려갔다.

하지만 낮아진 가격만큼 거래의 구조는 더 불분명해졌다.


청람철강 야드에는 기존 열연강판 2,000톤 이상이 남아 있었다. 톤당 96만 원의 정품과 94만~95만 원의 수입대응재였다. 눈앞의 재고는 비싸 보였다.

바다 위에 있다는 코일은 530달러였다. 훨씬 쌌다.

그러나 야드의 코일에는 생산자와 소유자가 있었다. 밀시트가 있었고 매입세금계산서가 있었다. 어느 거래처에 팔 수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바다 위의 코일에는 가격만 있었다.


김민철은 영업회의 자료의 제목을 바꿨다.

‘수입 열연 계약 검토’라는 문구를 지우고 이렇게 적었다.

‘가격이 아니라 물량의 경로를 산다.’


철강재는 제철소에서 생산돼 항구로 이동하고, 선박에 실려 통관을 거쳐 창고에 들어왔다. 그 모든 과정에는 서류와 책임자가 있었다.

가격만 그 경로를 건너뛸 수 있었다.

톤당 530달러라는 숫자는 이메일 한 통으로 한국 시장에 도착했다. 수요업체의 구매를 늦추고, 유통업체의 재고평가를 흔들고, 국산 가격의 상단을 낮췄다.

코일보다 가격이 먼저 상륙한 것이다.


박준호가 물었다.

“결국 그 물량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김민철이 대답했다.

“어딘가에는 있었겠지.”

“우리가 너무 조심한 것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어.”

“다른 업체가 정상적으로 수입해 큰돈을 벌 수도 있고요.”

“그럴 수도 있지.”


박준호는 오션브리지의 마지막 오퍼를 다시 바라봤다.

“그럼 우리가 놓친 게 무엇인지 어떻게 압니까?”

김민철은 청람철강 야드에 쌓인 코일을 가리켰다.

“정상적인 계약이었다면 이익을 놓친 거야.”


잠시 뒤 말을 이었다.

“정상적인 계약이 아니었다면 손실을 피한 거고.”

두 결과 가운데 어느 것이었는지는 당장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유통업체가 모든 싼 물량을 잡아야 살아남는 것은 아니었다. 설명할 수 있는 물량만 매입해도 시장에 남을 수 있었다.


그날 청람철강은 2,500톤의 수입계약을 포기했다.

대신 생산자와 선적항, 원산지와 소유권이 서로 맞지 않는 코일을 장부에 올리지 않았다.

바다 위의 싼 코일은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가격은 이미 국내 시장에 들어와 있었다.




이번 회차의 판재류시장

품목주간 기준선변동폭
국산 열연강판 정품96만 원/톤(약 667달러)약 1만 원 상승
열연 수입대응재94만~95만 원/톤(약 653~660달러)보합~강보합
열연 수입재92만~93만 원/톤(약 639~646달러)보합
중국산 열연 일반 수출약 500달러/톤 FOB제한적 등락
중국산 열연 한국향570달러대/톤MIP 반영
베트남산 열연 한국향약 540달러/톤 CFR중국산 대비 경쟁 우위
국산 후판100만 원/톤(약 694달러)보합~강보합
수입 후판96만~97만 원/톤(약 667~674달러)보합

주: 원화 가격은 1달러=1,440원을 적용해 환산한 참고값이다. 실제 도착원가는 규격, 운임, 통관비, 금융비용, 결제조건과 품질검사 비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번 회차에서 시장을 움직인 것은 통관된 수입량보다 앞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가격 신호였다. 낮은 오퍼는 수요업체의 구매를 늦추고 국내 유통재고의 협상가격을 끌어내렸다. 유통업체는 단순 재고량보다 현재 판매 속도와 수입재 도착 예상 시점이 겹치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수입계약에서는 오퍼가격과 환율만으로 수익성을 판단하기 어렵다. 생산 제철소, 실제 판매자, 원산지, 선적항, 밀시트, 선하증권과 물품 소유권이 하나의 경로로 연결돼야 한다. 코일이 실제 존재하더라도 계약 상대방에게 판매권한이 없다면 정상적인 소유권을 확보하지 못할 수 있다.


중국산 열연에 MIP가 적용되는 시장에서는 원산지의 의미가 더욱 커진다. 제3국을 경유한 물량은 단순 환적과 실질적 생산을 구분해야 하며, 낮은 가격이 규제 회피나 불분명한 원산지 구조에서 나온 것은 아닌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강철의 계절(14) — 일본으로 가지 못한 아연

일본이 한국산 용융아연도금강판에 높은 반덤핑 예비마진을 제시하자, 청람철강의 냉연도금 거래처에도 변화가 나타난다.

수출용으로 준비되던 GI가 국내 시장으로 방향을 돌릴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유통업체들은 가격 하락을 예상해 주문을 줄인다.

그 무렵 청람철강은 일본 수출이 막힌 도금강판을 특별가격에 인수해 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가격은 낮고 품질도 정상이지만 규격과 포장, 밀시트 표기가 일본 고객의 요구에 맞춰져 있다.


국내에서 판매하려면 재포장과 규격 전환이 필요하다.

그런데 서류를 검토하던 이유진은 해당 물량 가운데 일부가 이미 일본 구매자 명의로 생산됐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수출하지 못한 아연도금강판은 누구의 재고인가.

관세는 국경에서 부과되지만 그 비용은 다시 국내 창고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 이 작품은 실제 철강시장의 가격·수급·통상환경을 모티프로 창작한 픽션이다. 등장인물과 일부 기업·사건·거래 관계는 허구이며 실제 기업·단체·사건과 관련이 없다. 실제 기업명은 공개된 시장정보나 가격정책을 설명할 필요가 있을 때만 제한적으로 사용한다.


※ 작품에 포함된 원산지, MIP, 선하증권, 밀시트 및 수입계약 관련 내용은 산업서사를 위한 일반적 설명이다. 실제 통관과 소유권, 계약책임은 거래서류, 적용 법령, 원산지 기준과 관계기관의 판단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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