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8월 11일 (화)
누적 방문자 34,303
일일 방문자 2,182
~

강철의 계절⑰ — 채권과 코일 사이

제품: 열연 | 강철의 계절 17회


아크트레이솔루션의 압연기가 다시 돌아간 것은 H형강 매각대금이 입금된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공장 지붕 아래에서 모터가 낮게 울렸다. 먼지가 내려앉았던 롤러가 천천히 회전했고, 작업자들은 소리를 듣기 위해 서로 말을 멈췄다. 완전한 재가동은 아니었다. 밀린 전기료 일부를 납부하고 보전 인력을 불러 한 개 라인만 시험 운전하는 단계였다.


김민철은 관리인과 함께 안전선 밖에 서 있었다. 전회 긴급 납품에 사용한 H형강 120톤은 이 공장의 증축 잔량이었다. 그 물량을 청람철강이 적법한 절차로 매입하면서 아크트레이솔루션에는 처음으로 새 현금이 들어왔다. 과거 미수채권과 섞이지 않은 돈이었다.


관리인이 말했다.

“이제 열연만 들어오면 일주일은 돌릴 수 있습니다.”

“주문은 있습니까?”

“전력설비 받침대 680세트입니다. 납품까지 스무 날입니다.”

“대금은 언제 들어옵니까?”

“검수 후 45일입니다.”


김민철은 압연기보다 그 숫자를 오래 보았다.

스무 날 안에 제품을 만들고도 현금은 그 뒤 45일을 더 기다려야 했다. 열연 매입대금과 전기료, 임금, 운송비는 먼저 나갔다. 공장이 다시 움직이는 순간부터 현금은 더 빠르게 줄어들 터였다.



다시 온 주문서

다음 날 오전, 아크트레이솔루션 회의실에 네 사람이 모였다. 관리인, 생산부장 이유진, 청람철강의 김민철, 그리고 열연 트레이더 박준호였다.

박준호가 두 장의 견적서를 놓았다.


국산 정품 열연은 톤당 96만~97만 원이었다. 수입재는 93만 원 안팎이었다. 가격 차는 눈에 보였지만 납기가 달랐다. 국산은 사흘이면 들어올 수 있었고, 수입재는 창고에 있는 규격만 즉시 공급할 수 있었다. 주문에 필요한 폭과 두께를 모두 맞추려면 다음 도착분을 기다려야 했다.


생산부장이 말했다.

“전량 국산이면 납기는 맞습니다.”

관리인이 계산기를 두드렸다.

“원가가 너무 높습니다.”


박준호가 수입재 견적을 가리켰다.

“범용 규격 420톤은 바로 낼 수 있습니다. 나머지 280톤은 국산을 쓰면 됩니다.”

김민철이 물었다.

“바로 낼 수 있다는 물량의 결제조건은요?”

“현금입니다.”

“국산은?”

“청람이 보증하면 30일입니다.”


회의실의 시선이 김민철에게 모였다.

아크트레이솔루션이 회생절차에 들어가기 전 청람철강에 남긴 미수금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그 돈을 받지 못한 회사가 다시 지급보증을 서는 것은 장부만 보면 납득하기 어려웠다.


관리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번 주문은 확정입니다. 공장만 돌면 갚을 수 있습니다.”


김민철은 그 말을 전에도 들었다. 다음 주문이 들어오면, 다음 달 매출이 잡히면, 다음 프로젝트 대금이 나오면. 미래 매출로 오늘의 부족한 현금을 설명하는 문장은 언제나 비슷했다.


과거 채권과 신규 거래

청람철강 자금팀은 반대했다.

“보증을 서면 과거 채권 위에 신규 위험을 더 얹는 겁니다.”


영업팀은 다른 계산을 내놓았다.

“공장이 살아나면 기존 채권 회수 가능성도 커집니다.”

김민철은 두 계산 모두 맞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어느 쪽이 먼저 현실이 되느냐였다.


그는 회생관리인에게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열연 거래대금은 과거 채권과 상계하지 않고 신규 운영계좌에서만 집행할 것.

둘째, 700톤을 한 번에 공급하지 않고 생산주차별로 250톤, 250톤, 200톤으로 나눌 것.

셋째, 첫 납품대금의 일부를 발주처가 원재료 공급사에 직접 지급하는 구조를 협의할 것.

ADVERTISEMENT


관리인은 얼굴을 찌푸렸다.

“발주처에 회생 사실과 자금 사정을 더 드러내게 됩니다.”

“이미 계약심사에서 알 겁니다.”

“직접 지급을 요구하면 신뢰가 떨어질 수 있습니다.”

“원재료가 끊겨 납기를 어기는 것보다 낫습니다.”


생산부장 이유진은 생산계획표를 세 구간으로 나눴다. 첫 250톤으로 규격이 단순한 받침대를 만들고, 검사 승인이 나면 두 번째 물량을 투입한다. 가공이 까다로운 규격은 마지막 200톤에 배치했다. 한꺼번에 열연을 들여놓지 않아도 라인은 끊기지 않았다.


발주처는 처음에는 직접 지급을 거부했다. 하지만 납품 지연 시 전력설비 공정 전체가 미뤄진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원재료비 상당액을 선급금 형태로 지급하고 사용처를 제한하는 방식을 받아들였다.


첫 번째 코일

첫 열연 코일이 공장에 도착한 날, 김민철은 입고표에 적힌 소유권 조건부터 확인했다. 코일은 아크트레이솔루션의 신규 구매재였고, 청람철강의 과거 채권 담보가 아니었다. 생산된 제품의 매출대금도 신규 운영계좌로 들어가도록 계약서가 작성됐다.


자금팀장이 물었다.

“이렇게까지 분리하면 우리는 무엇을 얻습니까?”

“이번 거래의 대금입니다.”

“과거 돈은요?”

“회생절차에서 받아야지.”

“공장을 살리면서도 예전 채권은 기다립니까?”


김민철은 입고되는 코일을 바라봤다.

“과거 돈을 받겠다고 새 돈의 길을 막으면 공장도 멈추고 우리 채권도 남아.”

첫 주 생산은 계획보다 느렸다. 오래 멈췄던 절단기의 센서가 두 차례 오류를 냈고, 작업자는 코일 표면의 산화 흔적을 다시 확인했다. 그러나 250톤 분량의 제품은 약속한 날 출고됐다.


발주처의 선급금이 들어오자 두 번째 열연 250톤이 배차됐다. 거래는 신뢰가 아니라 확인된 현금과 다음 공정 사이에서 한 단계씩 진행됐다.


결말 — 코일은 채권을 갚지 않았다

스무 날 뒤 아크트레이솔루션은 680세트의 납품을 마쳤다. 공장 야드에는 마지막 코일의 포장철대만 남았다.

관리인이 김민철에게 말했다.

“이제 예전 미수금도 조금씩 갚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민철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관리계획대로 합시다.”

“청람이 가장 오래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더 섞으면 안 됩니다.”


이번 거래에서 청람철강은 큰 이익을 남기지 못했다. 전량을 고가 국산으로 공급하지도 않았고, 지급보증 수수료를 받을 수도 없었다. 대신 신규 물량의 대금은 예정대로 회수됐고 아크트레이솔루션의 라인은 한 달 더 돌 수 있게 됐다.


열연 코일은 과거 채권을 갚지 않았다.

그 코일이 한 일은 오늘의 생산과 내일의 현금을 이어주는 것이었다.


김민철은 공장을 나서며 박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음 수입 열연은 아직 계약하지 마십시오.”

“가격이 더 내려갈 것 같습니까?”

“아니. 주문이 먼저 들어오는지 보려고.”


전화기 너머로 잠시 웃음이 들렸다.

“가격보다 주문을 먼저 본다고요?”

“이번 주는 그래.”


김민철은 멈추지 않고 덧붙였다.

“그리고 현금이 어느 계좌로 들어오는지도.”

공장 안에서 두 번째 교대조가 압연기를 켰다. 소리는 돌아왔지만 회복은 아직 장부에 기록되지 않았다.

 

 

ADVERTISEMENT
RECOMMENDED CONTENT
기사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