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8월 11일 (화)
누적 방문자 34,304
일일 방문자 2,183
~

강철의 계절⑱ — 615달러에는 선적일이 없었다



해당 완제품: 후판 | 강철의 계절 18회


박준호는 부산항이 보이는 사무실에서 인도네시아산 후판 오퍼를 네 번 읽었다.

톤당 615달러. CFR. 10월적.

가격은 분명했다. 선적일은 ‘10월 중’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중국산은 659달러였다. 두 가격 사이에는 톤당 44달러가 있었다. 1,000톤이면 4만4,000달러였다. 대표는 숫자를 보자마자 말했다.

“잡아. 이 정도 차이는 흔치 않아.”


품질팀장은 오퍼 하단의 제철소 이름을 확대했다.

“첫 거래입니다.”

“그래서 싸겠지.”

“그래서 모르는 겁니다.”


해상풍력 하부구조물

박준호의 고객은 해상풍력 하부구조물을 제작하는 성진모듈이었다. 필요한 물량은 일반 구조용 후판 900톤과 충격인성 보증이 필요한 후판 300톤이었다. 납품은 11월 첫째 주부터 시작됐다.


성진모듈 구매팀은 가격을 낮춰야 했다. 발주처와 맺은 계약은 이미 원재료 단가가 고정돼 있었고, 국내산 후판만 사용하면 예상마진이 거의 남지 않았다. 인도네시아산을 섞으면 계산이 달라졌다.


그러나 품질승인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성적서 사전검토, 샘플 절단, 용접절차 확인, 발주처 승인까지 최소 5주가 걸렸다. 10월 중 선적이면 빠듯했고, 선적이 늦어지면 승인 전에 본물량이 항구에 도착할 수도 있었다.


성진모듈 구매팀장이 말했다.

“일반재 900톤만 수입으로 바꾸죠.”

품질담당자가 반대했다.

“일반재도 구조물에 들어갑니다. 제조자 승인 없이 못 씁니다.”

“가격 차를 놓치면 프로젝트 손실입니다.”

“승인 안 나면 900톤 전체가 재고입니다.”


박준호는 두 사람 사이에 선적표를 놓았다.

“가격을 둘로 나누지 말고 시간을 셋으로 나누죠.”


세 개의 계약

첫 계약은 120톤이었다. 샘플과 초도 생산분을 같은 열로 묶고, 선적 전 제3자 검사를 시행한다. 화학성분과 기계적 성질이 계약 기준을 벗어나면 나머지 물량을 취소할 수 있도록 했다.


두 번째 계약은 일반재 480톤이었다. 초도 검사 통과와 발주처의 조건부 승인 뒤 효력이 발생하도록 했다. 가격은 615달러를 기준으로 하되, 선적이 10월 20일을 넘으면 구매자가 계약량을 줄일 수 있었다.


세 번째 300톤은 계약하지 않았다. 성진모듈은 그 물량을 국내산 긴급조달 옵션으로 남겼다.


대표가 물었다.

“싸게 나온 물량을 왜 600톤만 잡습니까?”

“900톤을 사는 계약이 아니라 600톤을 쓸 수 있게 만드는 계약입니다.”

“나머지 300톤은 더 비싸질 수도 있어.”

“그때 사는 가격은 납기를 지키는 보험료입니다.”

ADVERTISEMENT


대표는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은행에서 신용장 한도를 600톤까지만 승인하면서 논쟁은 끝났다.


태풍의 경로

9월 말, 첫 120톤의 검사가 끝났다. 성분과 강도는 기준을 만족했지만 두께 공차가 허용범위의 한쪽 끝에 몰려 있었다. 가공수율을 계산하면 국내산보다 절단 잔재가 늘어날 수 있었다.


성진모듈 생산팀은 사용 가능 판정을 내렸다. 다만 폭별 배치도를 바꿔야 했다. 싼 후판을 그대로 쓰기 위해 설비의 절단 순서를 조정한 셈이었다.

그날 오후 남중국해에 태풍이 생겼다. 제철소는 선적항 작업이 이틀 늦어질 수 있다고 통보했다. 계약서에는 10월 20일 이후 물량 축소 조항이 있었지만, 태풍이 불가항력으로 인정되면 적용이 쉽지 않았다.


박준호는 선사와 제철소, 검사기관에 동시에 전화를 걸었다. 본선 이름, 예상 입항일, 적재순서를 확인했다. 오퍼에는 없던 정보였다.

성진모듈 구매팀장이 물었다.

“국내산 300톤 옵션을 지금 실행할까요?”

“아직입니다.”

“배가 늦으면 끝입니다.”

“첫 번째 선적 확인 뒤 결정하죠. 옵션 만료는 사흘 남았습니다.”


그 사흘 동안 환율도 움직였다. 달러가 오르면서 615달러의 원화 환산이 커졌다. 가격 차는 줄었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항구에 도착한 가격

본선은 예정보다 나흘 늦게 부산항에 들어왔다. 통관과 검수까지 합치면 공장 입고는 일주일 밀렸다. 성진모듈은 국내산 옵션 180톤만 실행했다. 나머지 공정은 수입재 도착 순서에 맞춰 다시 짰다.


첫 후판이 절단기에 올라갔을 때 박준호는 현장에 있었다. 작업자는 판의 마킹과 성적서를 대조하고 두께를 측정했다. 숫자는 계약 범위 안에 있었다.

그러나 절단 배치가 바뀌면서 잔재가 늘었다. 구매팀은 수입가격 차이에서 검사비, 금융비용, 추가 절단비, 국내산 긴급조달 비용을 차감했다. 44달러의 차이는 절반 가까이 줄었다.


대표가 말했다.

“그래도 남았군.”

박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요.”

“다음에도 615달러면 더 사야겠지?”

“다음 오퍼에는 선적일을 먼저 넣어야 합니다.”


결말 — 값싼 후판은 바다 위에서 비싸졌다

프로젝트 첫 납품은 지연 없이 끝났다. 성진모듈은 원가를 낮췄지만 처음 계산한 만큼은 아니었다. 인도네시아산 후판은 품질 기준을 통과했고, 신규 공급선은 승인 목록에 조건부로 이름을 올렸다.


박준호는 최종 원가표의 제목을 바꿨다.

‘615달러 후판’에서 ‘사용 가능한 후판의 총비용’으로.


가격은 계약서 첫 줄에 있었지만 이익은 마지막 검수 뒤에 나타났다. 그 사이에는 태풍, 환율, 선적, 승인, 절단수율과 은행 한도가 있었다.

퇴근 무렵 박준호에게 새 오퍼가 도착했다. 이번에는 가격이 608달러였다.


대표가 메시지를 보냈다.

‘더 싸졌다. 바로 확인.’


박준호는 가격보다 아래쪽을 먼저 읽었다.

선적 가능 시기: 10월 말 또는 11월 초.

그는 답장을 쓰지 않고 달력을 열었다. 615달러에는 선적일이 없었고, 608달러에는 두 개의 달이 적혀 있었다.


ADVERTISEMENT
RECOMMENDED CONTENT
기사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