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8월 12일 (수)
누적 방문자 36,250
일일 방문자 1,749
~

[철의 산책] 나비는 꽃을 선택했을까…철강시장을 움직이는 ‘사람의 향기’


어느 날 한 교수가 학생들에게 물었다.

“나비가 꽃을 찾아간 것일까, 아니면 꽃이 나비를 불러들인 것일까.”

학생은 나비가 스스로 꽃을 선택한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교수는 말했다.

겉으로는 나비가 꽃을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먼저 향기를 내보낸 것은 꽃이고 나비는 그 향기를 따라갔을 뿐이라는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를 읽다 보면 철강시장의 거래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거래처를 스스로 선택한다고 생각한다.

가격이 좋아서 거래하고, 물량이 있어서 거래하고, 결제 조건이 맞아서 거래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철강시장을 지켜보면 거래의 시작에는 숫자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이다.

“그 회사 사장, 예전에 어디 있었던 사람이야.”

“그 사람이면 믿을 만하지.”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인데 설마 문제가 있겠어.”

이런 말이 거래의 문을 열 때가 많다.


최근 광주 시***틸의 법정관리 관련 소식이 전해진 뒤에도 시장에서는 채권 규모만큼이나 사람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뒤따랐다.

특히 비교적 큰 채권이 거론된 세****스와 관련해 시**틸 대표가 과거 이 회사 출신이라는 말도 시장에서 나왔다.


물론 이러한 경력은 별도의 확인이 필요한 내용이다. 실제 근무 경력이 확인되더라도 그것만으로 이번 채권 관계나 법정관리와 특별한 연관성이 있다고 판단할 수도 없다.

그런데도 시장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철강 거래가 단순히 철판과 돈만 오가는 시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회사에서 근무했던 사람.

수십 년 동안 알고 지낸 사람.

어려울 때 물량을 먼저 내줬던 사람.

결제일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던 사람.


그런 기억이 오랜 시간 쌓이면 어느 순간 ‘신용’이라는 이름의 향기가 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그 향기를 따라 거래를 시작한다.

“저 사람이라면 괜찮겠지.”

철강시장에서 가장 따뜻하면서도 때로는 가장 위험한 문장 가운데 하나다.


처음에는 신뢰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지면 그 신뢰는 미수금이 되고 채권이 된다.

더 어려운 것은 신뢰에는 재무제표처럼 정확한 숫자가 없다는 점이다.

10년 동안 아무 문제 없이 거래했다고 해서 내일의 결제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유명한 회사 출신이라는 사실이 현재 운영하는 회사의 현금흐름까지 보증하지도 않는다.

좋은 인간관계가 좋은 담보를 대신할 수도 없다.

꽃의 향기가 나비를 불러들인다고 해서 모든 꽃이 나비에게 안전한 것은 아닌 것과 같다.


최근 철강시장에서는 이런 말까지 들린다.

“후판에 이어, 열연 업체가 부도가 났다. 냉연쪽에서도 냄새가 난다.”

여기서 ‘냄새가 난다’는 표현은 특정 냉연업체가 실제로 문제가 발생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다만 현장의 사람들이 그만큼 거래처의 자금 흐름에 예민해졌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평소 같으면 지나쳤을 작은 변화도 지금은 다르게 보인다.

결제가 하루 늦어진다.

평소보다 재고를 싸게 내놓는다.

월말 결제를 다음 달로 넘겨달라고 한다.

현금 대신 어음 이야기가 다시 나온다.

갑자기 기존보다 많은 물량을 외상으로 가져가려 한다.


이런 작은 변화 하나하나가 시장 사람들이 맡는 ‘냄새’가 된다.

철강시장은 가격보다 신용이 먼저 얼어붙을 때가 있다.

한 업체에서 채권 사고가 발생하면 다른 업체의 외상 한도까지 함께 줄어든다.

ADVERTISEMENT

“앞으로는 현금으로 거래하시죠.”

공급업체가 던지는 이 한마디가 유통업체에는 상당한 부담이 된다.


철강은 재고를 확보하는 데 많은 자금이 필요하다.

제품을 사들이는 순간부터 금융비용이 발생하고, 판매한 뒤 대금을 회수하기까지 다시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을 연결해 주는 것이 신용이다.

그 신용이 끊기면 장부에 이익이 있어도 회사의 현금은 마를 수 있다.


그래서 요즘 같은 시장에서는 다시 한번 묻게 된다.

우리가 거래처를 선택한 것일까.

아니면 상대방이 풍기던 ‘신용의 향기’를 따라간 것일까.

아마 둘 다일 것이다.


좋은 거래에는 가격도 필요하고 제품도 필요하며 사람도 필요하다.

하지만 위기의 시장에서는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

확인이다.


친분은 친분이고 채권은 채권이다.

과거의 인연은 인연이고 현재의 재무상태는 현재의 재무상태다.

“오래 알았으니까.”

“어디 출신이니까.”

“지금까지 문제없었으니까.”

채권 사고가 터진 뒤 철강시장에서는 이런 말이 자주 나온다.


신뢰하지 말자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오래 신뢰하기 위해서는 그 신뢰를 지켜주는 원칙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거래 한도를 확인하고, 담보와 보증서를 살피고, 결제일이 흔들리는지 지켜보고, 미수금이 늘어나면 이유를 물어야 한다.

좋은 관계일수록 이런 원칙을 지키는 것이 서로 오래 거래하는 방법이다.


워런 버핏의 유명한 말이 있다.

“썰물이 빠져나가야 누가 벌거벗고 수영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철강시장도 그렇다.

시황이 좋고 돈이 잘 돌 때는 거래처의 위험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경기가 꺾이고 자금이 돌지 않기 시작하면 그동안 가려졌던 신용위험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후판에서 경고음이 들리고, 열연에서도 문제가 불거지면서 냉연시장까지 사람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소문을 키우는 일이 아니다.

내 거래처를 다시 바라보는 일이다.

얼마를 팔고 있는가.

미수금은 얼마나 늘었는가.

마지막 결제는 언제였는가.

담보와 보증은 충분한가.

그리고 무엇보다 그 회사의 현금이 제대로 돌고 있는가.


꽃은 향기로 나비를 부른다.

사람도 향기로 사람을 부른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기업의 좋은 향기는 말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제때 지킨 결제일, 약속한 거래조건, 무리하지 않은 차입, 투명한 경영이 오랜 시간 쌓여 만들어진다.


철은 불 속에서 단단해지고, 신용은 위기 속에서 진짜 모습이 드러난다.

오늘도 철강시장에는 수많은 나비가 날아다닌다.

가격이라는 향기를 따라가기도 하고, 인맥이라는 향기를 따라가기도 하며, 오랜 신뢰라는 향기를 따라가기도 한다.

하지만 오래 살아남은 철강인들은 안다.

좋은 향기를 맡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을.

그 꽃의 뿌리가 얼마나 단단한지를 살펴보는 일이다.



[철의 산책 한마디]

“인연은 향기로 시작할 수 있지만, 거래는 신용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신용은 사람의 말보다 시간이 남긴 결제 기록에서 더 정확하게 드러난다.

ADVERTISEMENT
RECOMMENDED CONTENT
기사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