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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계절(25) — 두 번째 입찰서는 가격을 묻지 않았다



해당 완제품: H형강 | 2026년 8월 21일 금요일


청람철강이 반도체 산업단지에 긴급 H형강 600톤을 밀어 넣은 지 열이틀째 되는 금요일 아침이었다.

김민철의 책상 위에 두 번째 입찰서가 도착했다. 잔여 물량은 1,800톤. 그런데 첫 장을 넘긴 김민철의 손이 멈췄다. 가격을 적는 칸이 없었다.

대신 공급자가 답해야 할 질문이 빼곡했다. 규격별 보유재고, 제조자, 성적서 원본, 원산지 승인 상태, 절단 가능 여부, 일별 출고능력, 차량 배차계획, 대체조달처, 납기 지연 시 대응방안, 결제조건, 품질책임, 그리고 재고의 실제 위치.


영업팀장 한재호가 입찰서를 두 번 넘겨보더니 말했다. “단가표가 빠진 것 아닙니까?”

김민철은 첫 페이지를 다시 보았다. “빠진 게 아니야.”

“그럼 가격은 언제 받겠다는 겁니까?”

“우리가 물건을 실제로 댈 수 있다는 걸 확인한 다음이겠지.”


한재호가 의자를 당겨 앉았다. “지난번하고 완전히 다르네요.”

김민철이 입찰서 마지막 줄에 시선을 두었다. “가격 때문에 바뀐 게 아니라 지연 때문에 바뀐 거야.”


첫 번째 납품에서 발주처가 배운 것은 철강 가격이 아니었다. 싸게 계약했다고 자재가 공사장에 도착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이 두 번째 입찰서의 순서를 바꿔놓았다. 가격은 맨 뒤로 밀렸고, 창고와 트럭과 성적서가 앞으로 나왔다.


121만 원 뒤에 숨어 있는 것

오전 아홉 시 반, 형강팀 회의실. 화이트보드에는 세 숫자가 적혀 있었다. 119~120. 121. 136.

시장 실거래는 톤당 119만~120만 원 수준이었다. 일부에서는 122만 원 호가도 들렸다. 동국제강이 제시한 중소형 H형강 목표가격은 121만 원, 대형은 136만 원이었다. 가격 인상 적용 시점이 다가오면서 창고에는 인상 전 매입재와 신규 고가 재고가 섞이기 시작했다.


구매팀 박지훈이 말했다. “신규로 전량 채우면 원가가 올라갑니다.”

한재호가 바로 받았다. “그렇다고 119짜리 물건만 찾아다닐 수도 없잖아요.”

“가격 문제가 아닙니다. 필요한 규격이 없습니다.”


창고팀장 최은석이 입고표를 펼쳤다. “지난번 긴급 출고하면서 승인받은 대형 규격이 거의 빠졌습니다.”

김민철이 물었다. “남은 재고는?”

“물량은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입찰 규격하고 안 맞습니다.”


회의실이 잠잠해졌다. 장부상 재고와 팔 수 있는 재고는 달랐다. 창고에 H형강이 쌓여 있어도 고객이 요구하는 규격이 아니면 그것은 공급능력이 아니었다.

한재호가 볼펜으로 1,800톤이라는 숫자에 동그라미를 쳤다. “그래도 이 정도 물량이면 잡아야 하지 않습니까?”


재무팀장 서유경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무슨 조건으로요?”

“입찰입니다.”

“입찰인 건 압니다.”


서유경이 입찰서의 결제조건 항목을 두드렸다. “저는 이 칸을 묻는 겁니다.”

한재호의 얼굴이 굳었다. “또 돈 얘기입니까?”

“물건 1,800톤을 사서 창고에 넣는 순간부터 돈 얘기입니다.”


김민철은 두 사람을 말리지 않았다. 이번 회의에서 영업은 수주를 봤고 구매는 매입원가를 봤고 창고는 규격을 봤다. 재무는 시간을 보고 있었다. 매입대금이 나가는 날과 판매대금이 돌아오는 날 사이의 시간. 철강회사에서 가장 조용하지만 가장 비싼 시간이었다.



창고에서 드러난 첫 번째 거짓말

오전 열한 시. 김민철은 회의실을 나와 최은석과 창고로 내려갔다. 크레인이 움직일 때마다 거대한 H형강 묶음이 바닥에서 조금씩 들렸다. 작업자가 태그를 확인하고 다시 내려놓았다.


최은석이 한 구역을 가리켰다. “전산에는 판매가능으로 잡혀 있습니다.”

“실물은?”

“이쪽은 길이가 안 맞고, 저쪽은 성적서 확인이 필요합니다.”

“입찰서에는 보유재고를 쓰라고 돼 있잖아.”

“그래서 문제가 됩니다.”


최은석이 목소리를 낮췄다. “전산 숫자 그대로 적으면 우리가 물건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김민철이 고개를 돌렸다. “없는 건 아니잖아.”

“있지만 바로 못 냅니다.”


그 말이 더 정확했다. 철강 유통에서 ‘재고가 있다’는 표현은 때때로 네 가지 뜻을 가졌다. 창고에 있다는 것. 고객 규격에 맞는다는 것. 서류가 준비돼 있다는 것. 그리고 오늘 출고할 수 있다는 것. 그 네 가지가 모두 맞아야 진짜 재고였다.


김민철이 말했다. “입찰서에는 출고 가능한 재고만 써.”

최은석이 잠시 망설였다. “그러면 경쟁사보다 숫자가 작아 보일 수 있습니다.”

“작아도 돼.”

“수주에 불리합니다.”

“지난번 사고가 왜 났는데?”


최은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멀리서 크레인의 경고음이 세 번 울렸다.

김민철이 다시 말했다. “없는 재고를 크게 써서 따낸 계약이면 수주가 아니라 지연 예약이야.”


오후 두 시, 가격이 갑자기 중요하지 않아졌다

사무실로 돌아오자 상황이 바뀌어 있었다. 발주처 구매팀에서 추가 확인 전화가 왔다. 입찰 참여 업체마다 재고 위치를 확인하고, 필요하면 현장실사까지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한재호가 전화를 끊으며 말했다. “이 정도까지 합니까?”

박지훈이 웃지도 않은 채 말했다. “지난번에 데였으니까요.”

“경쟁사들도 다 보여주겠습니까?”

“안 보여주면 점수를 못 받겠죠.”


그때 재무팀장 서유경이 한 장의 결재문서를 들고 들어왔다. “신규 매입 한도 계산했습니다.”

한재호가 물었다. “얼마까지 가능합니까?”

서유경은 숫자를 말하지 않았다. “전량 선매입은 반대입니다.”

“또요?”

“수주도 안 됐는데 1,800톤을 먼저 잡아놓자는 겁니까?”

“가격 오르기 전에 사야죠.”


박지훈도 끼어들었다. “그건 맞습니다. 목표가격 적용이 본격화되면 신규 원가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서유경이 박지훈을 보았다. “가격이 오르면 재고가 더 비싸지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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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죠.”

“수주를 못 하면요?”


박지훈이 말을 멈췄다.

서유경은 한재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면 더 비싼 재고가 창고에 남습니다.”


이번에는 누구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김민철은 창밖의 야드를 보았다. 인상 전 재고를 확보하는 것은 유통업체가 늘 해온 일이었다. 가격이 오를 때 가장 먼저 움직이는 것은 구매였다. 하지만 수요가 약한 시장에서는 가격이 오른다는 이유만으로 재고를 늘리는 순간, 가격 인상분보다 금융비용과 할인판매 손실이 더 커질 수도 있었다.


그는 입찰서를 다시 펼쳤다. 가격란이 없는 이유가 조금 더 분명해졌다. 발주처는 싸게 사는 회사를 찾는 것이 아니었다. 끝까지 공급할 수 있는 회사를 찾고 있었다. 그렇다면 청람철강도 같은 방식으로 생각해야 했다. 많이 사놓은 회사가 아니라 필요한 순간 필요한 규격을 움직일 수 있는 회사가 되어야 했다.


세 개의 창고를 하나의 재고로 만들다

오후 네 시, 다시 회의가 열렸다. 이번에는 영업, 구매, 재무, 창고, 물류가 모두 들어왔다.

김민철이 말했다. “전량 확보 안 합니다.”

한재호가 예상했다는 듯 물었다. “그러면 1,800톤 입찰을 어떻게 합니까?”

“우리 창고 물량만으로 한다고 생각하니까 안 되는 거야.”


박지훈이 고개를 들었다. “외부 재고를 묶자는 겁니까?”

“그렇지.”

“가격이 다 다릅니다.”

“그래서 가격부터 계산하지 말자는 거야.”


서유경이 물었다. “그러면 무엇부터 봅니까?”

김민철이 입찰서 첫 페이지를 들어 보였다. “이 사람들이 우리한테 물어본 순서대로.”

재고. 성적서. 출고능력. 배차. 대체조달. 그리고 마지막에 가격.


박지훈은 거래처 재고표를 불러왔다. 최은석은 자사 창고에서 즉시 출고 가능한 규격만 별도로 뽑았다. 물류담당자는 어느 하치장에서 어느 현장까지 차량을 붙일 수 있는지 정리했다. 세 사람이 같은 화면을 보기 시작하자 조금 전까지 부족해 보이던 재고의 모습이 바뀌었다.


청람철강이 모든 물량을 소유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물량이 실제로 존재하고, 서류가 맞고, 정해진 날 움직일 수 있어야 했다.

한재호가 말했다. “이렇게 하면 마진은 줄어듭니다.”


김민철이 대답했다. “대신 재고는 덜 늘어.”

“경쟁사가 싸게 들어오면요?”

“싸게 들어와서 못 대면 지난번하고 똑같지.”

“그래도 입찰은 가격 아닙니까?”


김민철이 잠시 그를 바라봤다. “첫 페이지에 가격칸 있었어?”

한재호가 입을 다물었다.


마지막 승인

저녁 여섯 시를 조금 넘겨 최종 입찰안이 올라왔다. 청람철강은 보유재고를 부풀리지 않았다. 즉시 공급 가능한 물량과 추가 조달 가능한 물량을 구분했다. 제조사와 성적서 확인 여부도 따로 표시했다. 일별 출고 가능능력은 물류팀이 실제 차량 배차를 기준으로 적었다. 대체조달처도 확보 가능한 규격만 넣었다.


그리고 결제조건에는 한 문장이 추가됐다. ‘분할 납품에 따른 단계별 정산.’

서유경이 그 문장을 읽었다. “이 조건 안 받으면요?”

김민철이 말했다. “물량을 줄여야지.”


한재호가 놀란 얼굴로 그를 봤다. “1,800톤을 다 안 하겠다는 겁니까?”

“돈이 안 돌아오는데 왜 다 해?”

“이 프로젝트 잡으려고 지난번 600톤도 그렇게 뛰었잖습니까.”

“그래서 이번에는 배운 대로 해야지.”

“수주 규모가 작아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돼.”


김민철이 결재란에 서명했다. 볼펜 끝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지난번에는 납기를 맞추느라 우리가 재고를 쫓아다녔다.”

그가 펜을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현금이 따라올 수 있는 만큼만 물건을 움직인다.”


입찰서는 그날 저녁 발주처로 전송됐다. 가격은 마지막 페이지에 들어갔다. 하지만 김민철이 가장 오래 확인한 숫자는 단가가 아니었다. 출고일. 재고 위치. 그리고 돈이 돌아오는 날짜였다.


가격보다 비싼 약속

김민철이 사무실을 나설 때 창고에서는 마지막 출고 차량 한 대가 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헤드라이트가 H형강 묶음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시장에서는 여전히 119만 원이냐, 120만 원이냐, 121만 원을 지킬 수 있느냐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숫자들은 중요했다. 하지만 이번 입찰이 가르쳐준 것은 다른 것이었다.


가격은 계약서에 한 번 적힌다. 납기는 매일 증명해야 한다. 재고는 창고에 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고객이 요구한 규격으로 움직일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외상매출은 매출로 잡히는 순간보다 현금으로 돌아오는 날이 더 중요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한재호였다. “발주처에서 접수 확인 왔습니다.”

“뭐라고 해?”

“가격 조정 요청은 없고, 재고 위치 확인부터 하겠답니다.”


김민철이 웃었다. “그럼 제대로 읽었네.”

“뭘요?”

“우리도, 그쪽도.”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한재호가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얼마짜리 입찰이라고 봐야 합니까?”

김민철은 주차장 끝에서 멈춰 섰다. “톤당 얼마짜리라고 생각하지 마.”

“그러면요?”

“약속을 지킬 수 있는 만큼짜리 입찰이지.”

전화가 끊겼다. 창고 셔터가 천천히 내려왔다.


첫 번째 입찰에서 청람철강은 철강을 팔았다. 두 번째 입찰에서 팔아야 할 것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재고를 실제로 보유하고 있다는 증명. 정해진 날 출고할 수 있다는 증명. 그리고 그 거래를 끝까지 감당할 수 있다는 증명.


가격은 제철소가 발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거래의 바닥은 결국 누군가가 승인해야 만들어졌다. 그 승인은 가격표가 아니라 재고와 신용과 현금흐름 위에 찍히고 있었다.


그날의 가격


품목가격주간 변동
국산 중소형 H형강 시장 실거래톤당 119만~120만 원원자료상 변동폭 별도 미제시
중소형 H형강 목표가격톤당 121만 원적용 예정 가격
대형 H형강 목표가격톤당 136만 원적용 예정 가격
일부 유통 호가톤당 122만 원원자료상 변동폭 별도 미제시

※ 가격은 극중 인물의 의사결정을 설명하기 위한 시장 기준선으로만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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