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당 완제품: H형강 | 공간: 부산항 배후 철강창고, 토요일 저녁
토요일에도 열린 창고
토요일 저녁, 부산항 배후 철강창고. 정미라는 평일처럼 창고 문을 열었다. 월말이 다가오면 H형강은 무게만큼 현금을 잡아먹었다. 7월 말 가격 인상 때 사둔 물량이 아직 적지 않았다. 시장은 톤당 118만~119만원으로 내려와 120만원선이 무너졌다. 스크랩 가격이 세 차례 내려가자 고객들은 “원가도 내렸는데 왜 형강은 안 내리냐”고 물었다.
창고반장이 말했다. “국산 고가 재고가 아직 많이 남았습니다.”
미라가 물었다. “수입재는?”
“일본산, 베트남산은 여지가 있습니다. 국산은 맞추기 어렵습니다.”
“재고표 다시 주세요.”
“규격별로요?”
“아니요. 결제일별로.”
창고반장이 잠시 멈췄다. 미라는 재고표를 제품별로 보지 않고 결제일별로 다시 정렬했다. 다음 주 결제해야 할 코일센터 대금, 은행 한도, 고객 입금일을 한 장에 놓으니 답이 달라졌다. 가장 먼저 팔아야 할 것은 가장 비싼 재고가 아니라 가장 먼저 현금을 묶는 재고였다.
500톤 문의
저녁 무렵 한 철골 제작사에서 500톤 문의가 들어왔다. 가격은 118만원, 납기는 열흘, 결제는 45일.
영업사원이 말했다. “시장가격입니다. 잡아야 합니다.”
미라가 물었다. “500톤 전부 45일?”
“예.”
“그럼 우리 결제일하고 안 맞습니다.”
“가격을 더 받으면 놓칩니다.”
“가격을 더 받자는 게 아닙니다.”
미라는 거래처에 전화를 걸었다.
“300톤은 118만원에 가능합니다.”
상대가 바로 물었다. “나머지 200톤은요?”
“30일 현금 조건이면 같은 흐름으로 맞춰보겠습니다.”
“결제를 왜 나눕니까?”
“대신 규격 구색을 맞춰 한 번에 납품하겠습니다. 작업손실 줄여드리죠.”
철골 제작사는 여러 규격을 따로 받으면 현장 적치와 절단 계획이 꼬였다. 미라는 가격을 더 내리지 않고 고객의 공정비를 줄이는 방식으로 협상했다.
상대가 말했다. “결국 돈은 빨리 달라는 거네요.”
미라가 답했다. “우리는 가격을 더 안 내리고, 귀사는 공정 손실을 줄이는 겁니다.”
“300톤 45일, 200톤 30일?”
“그 조건이면 한 번에 맞춰드리겠습니다.”
협상은 길었지만 결국 방향이 잡혔다.
120만원이 무너진 뒤의 재고
영업팀은 거래가 성사된 뒤에도 불만이 남았다. “120만원선이 깨졌는데 118을 더 열어주면 시장이 더 내려갈 수 있습니다.” 미라가 말했다. “그래서 전량을 같은 조건으로 안 준 겁니다.” “하지만 118은 남습니다.” “가격만 남는 게 아닙니다. 결제조건도 남습니다.”
그녀는 재고표를 다시 띄웠다. 7월 말 고가에 들어온 국산 재고와 상대적으로 여지가 있는 수입재가 섞여 있었다. 국산 고가 재고를 억지로 시장가격에 맞추면 손실이 커진다. 그렇다고 비싸다는 이유로 창고에 오래 두면 금융비용이 쌓인다.
“먼저 팔아야 할 건 가장 비싼 재고가 아닙니다.”
영업사원이 물었다. “그럼요?”
“가장 먼저 현금을 묶는 재고.”
월말의 재고 전략은 가격이 아니라 시간의 문제였다.
4분기 보수 기대 협상 뒤
미라는 4분기 보수 일정을 다시 확인했다. 생산라인 정기수리가 집중되면 연말 공급이 타이트해질 수 있다. 시장에서는 벌써 보수 이후 가격 반등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구매담당자가 말했다. “보수 전에 물량을 더 잡아두는 게 낫지 않을까요?”
미라가 물었다. “실제 주문은?”
“아직 확정된 건 아닙니다.”
“그럼 기대만 있는 겁니다.”
“공급이 타이트해지면 지금 가격이 싸 보일 수 있습니다.”
“월말 현금이 먼저입니다.”
그녀는 신규 매입을 절반으로 줄이기로 했다. 보수 전 마지막 공급계약은 옵션 형태로 남겨두었다. 필요하면 잡을 수 있지만 지금 당장 재고로 만들지는 않는 방식이었다.
구매담당자가 물었다. “반등을 놓치면요?”
미라가 답했다. “반등을 놓치는 것과 현금을 놓치는 것 중 하나를 고르라면 지금은 현금입니다.”
오래된 120만원 견적서
창고 불을 끄기 전 미라는 책상 서랍에서 120만원이 적힌 오래된 견적서를 꺼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지켜야 할 기준으로 보였던 숫자였다. 이제 시장은 그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그녀는 견적서를 찢지 않고 다시 서랍에 넣었다.
창고반장이 물었다. “왜 안 버리십니까?”
“기준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기억하려고요.”
“다시 120이 올 수도 있지 않습니까?”
“올 수도 있죠.”
“그럼 지금 더 사야 하는 거 아닙니까?”
미라가 웃었다. “그 질문을 이번 주에 몇 번 들었는지 알아요?”
그녀는 셔터가 내려가는 소리를 들으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가격은 다시 올라올 수 있어요. 하지만 현금이 한 번 막히면 다음 가격을 볼 기회 자체가 없어집니다.”
다음 주에는 4분기 보수와 실제 주문이 만나 120만원선이 다시 살아날지, 아니면 또 다른 월말이 먼저 올지 결정될 것이다. 정미라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전망을 맞히는 일이 아니었다. 살아남을 만큼만 재고를 들고, 돌아올 돈의 날짜를 놓치지 않는 일이었다.
월말 회의에서 바뀐 질문
다음 주 결제일을 앞두고 미라는 창고사무실에서 짧은 월말 회의를 열었다. 평소라면 “어느 규격이 많이 남았는가”부터 물었지만 이날 첫 질문은 달랐다.
“다음 주 가장 먼저 나가는 돈이 뭡니까?”
재무담당자가 자금표를 펼쳤다. “국산 고가 재고 매입대금이 먼저입니다.”
영업사원이 말했다. “그 물량은 지금 118에 맞추기 어렵습니다.”
미라가 물었다. “그럼 현금으로 바꾸기 쉬운 다른 규격은?”
“수입재 쪽이 낫습니다.”
“수입재부터 돌려서 결제자금을 만들고, 국산은 손실 한도를 따로 잡읍시다.”
영업사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비싼 재고를 먼저 빼야 평균원가가 내려가지 않습니까?”
“평균원가보다 통장 잔액이 먼저입니다.”
그 말 뒤에 회의가 조용해졌다. 미라의 기준은 재고평가가 아니라 자금순환이었다. 비싼 재고를 무리하게 할인해 손실을 확정하는 것보다, 먼저 현금화할 수 있는 물량을 돌려 결제일을 넘기는 편이 나을 수 있었다.
오후에는 4분기 보수 얘기가 다시 나왔다. 한 직원이 “보수로 공급이 줄면 지금 재고가 보물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미라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보물이 되기 전에 이자가 붙습니다.”
“그래도 매입 절반 축소는 너무 보수적이지 않습니까?”
“옵션은 남겨뒀습니다. 주문이 실제로 오면 움직일 수 있어요.”
미라는 ‘확정 매입’과 ‘옵션 물량’을 분리해 관리하게 했다. 미래의 공급 부족 가능성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지금 재고로 묶이는 돈은 줄였다.
창고 끝에는 120만원 기준으로 들어온 오래된 물량이 남아 있었다. 시장은 이미 그 아래였다. 그러나 그 재고는 실패의 증거만은 아니었다. 가격이 오를 것이라는 기대와 실제 수요가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기록이었다.
미라는 직원들에게 말했다. “다음에는 가격이 오른다는 말만 듣고 사지 맙시다. 언제 팔리고 언제 돈이 들어오는지까지 같이 적읍시다.”
120만원 아래의 시장에서 그녀가 지키려는 것은 가격선이 아니었다. 다음 거래를 할 수 있는 현금의 선이었다.
그날의 가격
| 품목 | 가격 | 주간 변동 |
|---|---|---|
| H형강 | 118~119만원/톤 | -1만원 |
※ 가격은 극중 인물의 의사결정을 설명하기 위한 시장 기준선으로만 사용했다.
이 작품은 실제 철강시장 자료를 모티프로 창작한 픽션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일부 기업·사건은 허구이며, 실제 기업·단체·사건과 관련이 없다. 실제 기업명은 공개된 시장정보와 가격정책을 설명하기 위한 범위에서만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