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의 산책] 쓸모없는 재고는 없다, 자리를 잘못 찾은 자산이 있을 뿐이다](https://www.steelinfosys.com/storage/editor-images/ext_6a8f8c71b31145.65777447.png)
철강회사에서 가장 먼저 퇴출 대상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오래된 설비, 느린 직원, 잘 팔리지 않는 규격, 회전이 더딘 재고, 마진이 낮은 거래처가 그 후보에 오른다. 경영은 늘 효율을 요구하고, 효율의 언어는 쓸모를 빠르게 판정한다.
그러나 철강산업은 쓸모를 너무 빨리 재단할 때 오히려 더 큰 비용을 치르기도 한다. 오늘 팔리지 않는 규격이 내일 긴급 수요를 메울 수 있고, 당장 매출이 크지 않은 거래처가 시장 급변기에 가장 안정적인 현금원이 될 수 있다. 생산성이 낮아 보이는 공정이 품질 안정성을 떠받치고, 눈에 띄지 않는 직원이 클레임과 납기 문제를 조용히 막고 있을 수도 있다.
최신 원자료에는 장자의 ‘쓸모없음의 쓸모’를 떠올리게 하는 큰 가죽나무 이야기가 나온다. 목재로 쓰기 어렵다는 이유로 무가치해 보였던 나무가, 오히려 잘리지 않고 오래 남아 사람들에게 그늘을 제공한다는 이야기다. 이 일화를 철강 경영의 언어로 바꾸면 질문은 선명해진다. 우리가 ‘쓸모없다’고 판정한 것의 기준은 정말 회사 전체의 가치 기준이었을까.
재고는 팔리는 속도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
철강 유통에서 재고는 가장 먼저 효율성 평가를 받는다. 회전이 빠른 품목은 좋은 재고이고, 오래 남아 있는 품목은 나쁜 재고로 분류되기 쉽다. 기본적으로 맞는 말이다. 장기재고는 금융비용과 창고비를 늘리고 가격 하락기에는 평가손 위험까지 키운다.
하지만 모든 느린 재고가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특정 두께의 후판, 드문 규격의 형강, 납기가 긴 수입대체 소재처럼 평소에는 잘 움직이지 않아도 특정 고객에게는 공급 안정성을 만들어 주는 품목이 있다.
이런 재고까지 단순히 회전일수 하나로 제거하면 회사는 몸집은 가벼워질 수 있지만 대응력도 함께 줄어든다. 고객은 가격만 보는 것이 아니라 ‘급할 때 물건이 있는가’를 기억한다. 재고관리의 목적은 무조건 적게 보유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가 어떤 시장을 지킬 것인지에 맞춰 재고의 역할을 다시 정의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경영자는 장기재고를 볼 때 두 가지를 구분해야 한다. 팔리지 않아서 남은 재고인지, 일부러 준비해 둔 전략재고인지다. 전자는 줄여야 하지만 후자는 고객기반과 공급전략 안에서 따로 평가해야 한다.
매출이 작은 고객이 회사를 지킬 때가 있다
영업조직에서도 ‘쓸모’의 기준은 흔히 매출액이다. 큰 고객은 중요하고 작은 고객은 후순위로 밀린다. 그러나 철강시장은 한두 개 대형 거래처만으로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어렵다.
대형 고객은 물량이 큰 만큼 협상력도 강하다. 가격인하 요구가 크고 결제조건도 길어질 수 있다. 반면 소규모 가공업체나 지역 유통상 가운데는 주문량은 작아도 현금회전이 빠르고 마진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곳이 있다.
호황기에는 이런 고객의 존재감이 작다. 하지만 대형 수요가 위축되고 프로젝트 물량이 끊기면 작은 거래처들의 분산된 주문이 현금흐름을 지탱한다.
매출액만으로 고객의 가치를 평가하면 회사는 어느 순간 높은 매출과 낮은 현금을 동시에 갖게 된다. 고객의 진짜 가치는 매출, 마진, 회수기간, 거래 지속성, 수요 변동성을 함께 봐야 드러난다.
사람도 KPI 하나로는 보이지 않는다
철강산업은 여전히 사람의 경험이 중요한 산업이다. 설비는 자동화되고 거래 시스템은 디지털화되지만, 품질과 납기와 거래처 신뢰가 충돌하는 순간에는 결국 사람이 판단한다.
조직 안에는 매출을 크게 만드는 사람도 있고, 문제를 크게 만들지 않는 사람이 있다. 후자는 성과표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
클레임이 생기기 전에 규격을 다시 확인하는 직원, 출하 직전 고객의 요구를 점검하는 창고 담당자, 무리한 여신확대를 막는 재무 담당자, 잘못된 매입을 회의석상에서 반대하는 구매 담당자는 당장의 매출을 올리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역할이 사라지면 회사의 위험비용이 뒤늦게 드러난다. 사람을 평가할 때도 ‘얼마를 벌었는가’와 함께 ‘어떤 손실을 막았는가’를 봐야 한다.
저효율 설비와 저효율 제품의 다른 얼굴
철강사는 설비와 제품 포트폴리오를 계속 정리한다. 수요가 줄어든 제품, 원가경쟁력이 떨어진 라인, 가동률이 낮은 설비는 구조조정의 대상이 된다. 이것은 당연한 경영행위다.
다만 산업전환기에는 현재 수익성이 낮다는 이유만으로 미래의 선택권까지 없애는 오류를 경계해야 한다.
특정 설비가 지금은 비효율적이어도 고객 인증, 소량 다품종 대응, 특수강종 생산, 시험생산과 같은 기능을 담당할 수 있다. 단기 손익만 보면 제거 대상이지만 회사 전체 기술 포트폴리오에서는 옵션가치를 가진다.
경영의 어려움은 여기에 있다. 모든 비효율을 보호할 수는 없지만 모든 비효율을 제거해서도 안 된다. 구조조정의 목적은 가장 작은 회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강한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쓸모없음의 쓸모는 방치의 논리가 아니다
장자의 일화를 경영에 적용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할 점이 있다. ‘쓸모없는 것도 가치가 있다’는 말을 비효율을 그대로 두자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움직이지 않는 재고를 전략재고라고 부르고, 실적 없는 직원을 숨은 인재라고 부르며, 적자사업을 미래가치라고 포장하기 시작하면 조직은 금세 무너진다.
핵심은 무조건 보존이 아니다. 평가기준을 하나 더 늘리는 것이다.
재고라면 회전율뿐 아니라 공급안정성까지, 고객이라면 매출뿐 아니라 현금회수와 마진까지, 사람이라면 실적뿐 아니라 위험예방과 조직 기여까지, 설비라면 현재 수익성뿐 아니라 기술과 선택권까지 보는 것이다.
철강 경영은 버릴 것과 남길 것을 구분하는 일이다
시장 침체가 길어질수록 기업은 많은 것을 버려야 한다. 재고를 줄이고, 불필요한 비용을 끊고, 부실 거래처의 여신을 회수하고, 수익성이 낮은 사업을 재검토해야 한다.
그러나 위기 때 가장 위험한 구조조정은 ‘눈에 잘 안 보이는 가치’부터 없애는 것이다.
창고 여유, 안전재고, 숙련인력, 거래처 신뢰, 소량 대응능력, 품질 데이터, 오래된 공급망 관계는 손익계산서 한 줄로 평가하기 어렵다. 그러나 시장이 급변하면 바로 그 자산들이 회사의 회복속도를 결정한다.
철강은 강도를 높이기 위해 모든 성분을 하나로 만들지 않는다. 필요한 성질에 따라 성분과 조직을 조정한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모두를 가장 빠르고 가장 효율적인 형태로 만들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쓸모없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어떤 상황에서 쓸모를 갖는가를 아는 것이다.
결국 ‘쓸모없음의 쓸모’는 철강 경영에서 낭만적인 위로가 아니다. 자원의 역할을 다시 분류하라는 요구에 가깝다.
팔리지 않는 재고는 줄여야 한다. 하지만 공급전략에 필요한 재고까지 없애서는 안 된다. 성과가 낮은 사업은 정리해야 한다. 그러나 미래의 선택권까지 함께 버려서는 안 된다. 직원은 성과로 평가해야 하지만 손실을 막는 역할도 같이 봐야 한다.
회사는 쓸모 있는 것만 모아 놓는 곳이 아니다. 서로 다른 기능이 맞물려 하나의 위험을 견디는 구조다.
시장 불황이 깊어질수록 경영자는 더 자주 버려야 한다. 그럴수록 한 번 더 물어야 한다. 지금 버리려는 것은 정말 쓸모없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그 쓸모를 아직 계산하지 못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