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표가 아니라 설계도에 들어가라…고부가 철강의 ‘스펙인·락인’ 영업전기강판과 초고장력강 등 고부가 철강은 단순한 가격 경쟁으로 판매되지 않는다.
고객의 개발 단계부터 참여해 소재를 설계와 생산공정에 스펙인하고 품질 승인을 확보해야 장기 공급관계와 높은 전환비용을 기반으로 한 락인 효과가 만들어진다.
전기강판·초고장력강은 톤당 가격만으로 팔리지 않는다…개발 단계부터 고객 공정에 들어가야 장기 공급권이 만들어진다
자동차 부품업체 구매팀이 새로운 소재 공급업체를 검토한다고 해보자.
새 공급사가 제시한 가격은 기존 업체보다 낮다. 일반적인 철강 거래라면 가격협상이 시작될 만한 조건이다.
하지만 품질팀과 생산기술팀의 반응은 다를 수 있다.
“이 소재로 금형 테스트를 다시 해야 한다.”
“용접 조건도 확인해야 한다.”
“양산라인에서 균열이나 스프링백 문제가 없는지 검증해야 한다.”
“완성차 고객의 승인까지 다시 받아야 할 수도 있다.”
순간 구매가격 몇 만원의 차이는 문제의 일부로 밀려난다. 소재를 바꾸는 데 들어가는 시험, 시간, 생산 차질 위험과 승인 절차가 훨씬 큰 비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기강판이나 자동차용 초고장력강처럼 고객의 제품 성능과 생산공정에 깊숙이 들어가는 철강재에서는 이런 장면이 낯설지 않다.
여기서 철강 영업은 더 이상 단순한 판매가 아니다. 고객의 설계와 생산공정 안에 자신의 소재를 집어넣는 과정, 즉 스펙인(Spec-in)이 된다.
그리고 한번 승인받은 소재가 쉽게 다른 공급자의 제품으로 바뀌지 않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이것이 고부가가치 철강 영업에서 말하는 락인(Lock-in)의 본질이다.
범용재는 가격표에서 시작하지만 고부가재는 도면에서 시작한다
일반적인 범용 철강재의 영업에서는 가격, 재고, 납기와 결제조건이 중요하다. 동일하거나 유사한 규격을 여러 공급자가 생산하고 있고 고객이 공급사를 변경하는 데 큰 기술적 장애가 없다면 가격 경쟁은 자연스럽게 강해진다.
열연이나 일반 구조용 강재 가운데 상당 부분이 이런 시장의 성격을 갖는다. 물론 범용재 역시 제조사, 품질, 납기와 거래관계에 따라 차이가 발생한다. 그러나 고객 입장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품질만 확보된다면 공급사를 비교적 쉽게 바꿀 수 있는 제품일수록 가격의 영향력이 커진다.
반면 고부가가치재는 다르다.
전기자동차 구동모터에 들어가는 무방향성 전기강판은 단순한 얇은 철판이 아니다. 자속밀도와 철손 등 전자기적 특성이 모터 효율과 직결된다.
자동차 차체와 충돌안전 부품에 사용하는 초고장력강 역시 인장강도만 높다고 끝나는 제품이 아니다. 성형성, 용접성, 치수정밀도, 표면품질과 고객의 프레스 조건까지 맞아야 한다.
이런 제품을 판매하는 영업사원은 고객에게 먼저 묻는 질문부터 달라진다. “몇 톤 필요합니까?”보다 앞서 “어디에 사용할 것인가”, “어떤 성능을 요구하는가”, “현재 공정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가”를 확인해야 한다.
가격표보다 도면과 공정조건을 먼저 봐야 하는 영업이다.
스펙인은 ‘제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제품을 설계에 넣는 것’이다
스펙인은 고객이 특정 소재 또는 특정 성능의 소재를 제품 설계와 생산조건에 반영하도록 만드는 과정이다.
철강사가 새로운 초고장력 자동차강판을 개발했다고 해서 바로 판매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먼저 어떤 자동차 부품에 적용할 수 있는지 찾아야 한다. 그다음 고객의 요구 강도와 성형조건을 확인한다.
샘플 소재를 공급해 가공성과 용접성을 시험하고, 실제 금형에서 성형시험을 하며, 필요하면 소재 특성과 공정조건을 함께 조정한다. 시험 결과가 기준을 충족하면 시생산을 거쳐 양산 적용 가능성을 검토한다. 자동차 공급망에서는 고객사별 품질 승인과 양산 검증 절차가 추가될 수 있다.
즉 주문서를 받기 전에 상당한 영업이 이미 진행된다.
| 단계 | 주요 업무 | 영업의 핵심 역할 |
|---|---|---|
| 수요 발굴 | 신규 모델·제품·공정 파악 | 적용 가능 프로젝트 선점 |
| 기술 제안 | 요구 성능과 강종 매칭 | 가격보다 솔루션 제시 |
| 샘플 공급 | 시험재·시제품 공급 | 개발 일정 관리 |
| 공정 검증 | 성형·용접·가공·성능 확인 | 기술부서와 고객 연결 |
| 품질 승인 | 고객 기준 충족 확인 | 승인 과정의 문제 해결 |
| 양산 적용 | 정기 공급 시작 | 납기·품질 안정화 |
| 장기 관리 | 품질 개선·차기 모델 대응 | 다음 프로젝트까지 관계 확장 |
범용재 영업에서는 주문을 받은 뒤 제품을 공급한다. 고부가재 영업에서는 반대로 주문이 나오기 훨씬 전부터 영업이 시작된다.
영업사원 혼자서는 팔 수 없는 제품
이 단계부터 고부가가치재 영업은 개인 영업의 영역을 벗어난다.
일반 유통영업에서는 영업사원이 가격과 재고, 납기를 확인해 고객과 거래를 결정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전기강판이나 초고장력강은 영업사원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연구개발 부서는 소재 특성을 설명해야 한다. 생산 부서는 실제 생산 가능한 규격과 납기를 판단해야 한다. 품질 부서는 고객 요구사항과 시험기준을 확인한다. 기술지원 인력은 고객 가공현장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영업은 이 모든 조직을 고객과 연결한다. 따라서 고부가재 영업사원의 역할은 단순히 ‘파는 사람’보다 프로젝트 매니저에 가깝다.
승인이 끝나면 가격경쟁의 룰이 달라진다
가장 큰 변화는 양산 승인이 끝난 뒤 나타난다.
범용재 시장에서는 경쟁사가 톤당 가격을 낮추면 고객이 공급선을 옮길 가능성이 높아진다. 고부가재에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이미 특정 소재를 기준으로 제품이 설계되고 생산공정이 안정화됐다면 새로운 공급사로 전환할 때 다시 검증해야 할 항목이 생긴다. 소재 특성이 조금만 달라져도 성형 조건이 달라질 수 있고, 용접조건을 수정해야 할 수도 있으며, 품질승인을 다시 받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공급사를 바꾸는 비용은 구매가격 차이만으로 계산할 수 없다. 이를 전환비용(Switching Cost)이라고 볼 수 있다.
고부가 철강에서 락인은 바로 이 전환비용에서 만들어진다. 그러나 락인은 고객을 억지로 묶어놓는다는 뜻이 아니다. 고객의 제품과 공정에 깊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다른 소재로 바꾸는 데 검증과 비용이 필요해지는 관계다.
그래서 진짜 경쟁은 양산이 아니라 개발 단계에서 벌어진다
고부가재 시장에서 가장 치열한 순간은 제품을 대량 공급할 때가 아닐 수 있다. 오히려 신차나 신규 모터, 신형 가전제품이 개발되는 초기 단계가 더 중요하다.
어느 철강사의 소재가 초기 설계에 반영되는지가 몇 년간의 공급관계를 좌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경쟁사 제품이 적용돼 양산에 들어간 뒤 영업을 시작하면 늦을 수 있다.
따라서 기술영업은 고객의 구매부서만 방문해서는 안 된다. 연구개발, 설계, 생산기술, 품질 부서와 동시에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구매는 가격을 보고, 설계는 성능을 보고, 생산은 가공성을 보고, 품질은 안정성을 보고, 경영진은 공급망 위험과 원가를 본다. 고부가재 영업은 이 서로 다른 요구를 하나의 제안으로 묶어야 한다.
전기강판은 ‘철판 판매’보다 고객의 효율을 판다
전기강판은 기술영업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제품이다. 모터용 무방향성 전기강판의 고객에게 중요한 것은 소재 자체의 톤당 가격만이 아니다. 모터의 에너지 효율, 출력, 크기와 열 발생 등이 모두 소재 성능과 연결된다.
철손이 낮아지고 자기적 특성이 개선되면 고객은 더 효율적인 모터를 설계할 여지가 생긴다. 따라서 전기강판 영업에서는 단순히 “우리 제품이 톤당 얼마다”라고 설명해서는 경쟁력이 충분하지 않다. “이 소재를 적용했을 때 고객 제품의 성능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가격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성능을 판매하는 셈이다.
초고장력강도 강도 숫자만 팔아서는 안 된다
자동차용 초고장력강 역시 마찬가지다. 강도를 높이면 자동차 차체를 경량화하면서 충돌안전성을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진다. 하지만 강도가 올라갈수록 성형은 어려워질 수 있다.
따라서 고객 입장에서는 단순히 더 강한 소재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충분히 강하면서도 자신의 생산설비에서 안정적으로 가공할 수 있는 소재가 필요하다.
철강사가 아무리 뛰어난 강재를 개발해도 고객 프레스에서 제품이 깨지거나 치수 정밀도가 나오지 않는다면 상품으로서 의미가 줄어든다. 이 때문에 고부가재의 기술경쟁은 고객 공장에서 완성된다.
고부가재의 높은 마진에는 보이지 않는 비용이 있다
고부가가치재는 일반적으로 범용재보다 높은 가격과 수익성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높은 판매가격만 보고 수익성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제품이 양산되기 전에 연구개발비, 시험 생산비, 샘플 공급비, 기술지원 인력 투입 등 상당한 비용이 들어간다. 고객 승인을 받지 못하면 개발에 들어간 비용이 실제 매출로 연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고부가재에서는 제품 개발부터 양산 종료까지 프로젝트 전체 기간의 수익성을 봐야 한다. 초기 개발비가 크더라도 장기간 안정적인 물량이 이어진다면 높은 수익을 확보할 수 있다. 반대로 개발에는 성공했지만 고객 모델의 판매량이 예상보다 작으면 기대했던 수익을 얻지 못할 수 있다.
락인은 영원하지 않다
고객 승인을 받았다고 영구적인 공급권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대형 수요가는 공급망 위험을 줄이기 위해 복수 공급자를 확보하려는 경향이 있다. 경쟁사가 더 좋은 소재를 개발할 수도 있고, 차세대 모델에서는 소재 설계가 바뀔 수 있다.
지속적인 품질 문제나 납기 차질이 발생하면 어렵게 확보한 공급권도 흔들린다. 가격 격차가 지나치게 벌어지면 고객은 재승인 비용을 감수하고라도 다른 공급자를 찾는다.
따라서 락인은 가격을 마음대로 올릴 수 있는 권리가 아니다. 고객과 장기적으로 거래할 수 있는 대신 공급자는 더 높은 수준의 품질, 납기, 기술지원 책임을 지게 된다. 진입장벽이 높을수록 한번 발생한 실패의 비용도 커진다.
유통사와 SSC도 기술영업에서 역할이 달라진다
고부가재가 제조사와 최종 수요가의 직거래만으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가공센터와 SSC는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고객은 소재 자체뿐 아니라 정확한 폭과 길이, 표면품질, 포장과 납기를 요구한다. 특히 자동차·가전 공급망에서는 필요한 물량을 필요한 시점에 공급하기 위한 재고와 가공체계가 중요하다.
이때 SSC는 단순히 코일을 잘라주는 곳이 아니다. 소재 특성을 이해하고 가공품질을 유지하며 제조사와 고객 사이에서 재고를 관리하는 공급망의 일부가 된다.
범용재 유통에서는 “얼마에 사서 얼마에 팔았는가”가 중요한 질문이라면 고부가재를 취급하는 SSC에서는 하나가 더 붙는다. “이 고객의 생산라인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가.”
가격을 깎는 영업에서 바꾸기 어려운 공급자가 되는 영업으로
고부가가치 철강 영업이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가격경쟁을 피하는 방법에 있다.
가격경쟁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높은 가격을 요구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고객이 다른 공급자와 단순 가격 비교를 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래 안에 더 많은 가치를 집어넣는 것이다.
기술을 제공하고, 공정을 지원하고, 품질을 안정시키고, 개발 일정을 함께 맞추고, 가공과 물류를 안정화하며, 다음 제품 개발에도 다시 참여한다. 그 결과 고객은 공급자를 단순한 철강재 판매회사가 아니라 자신의 제품을 함께 만드는 파트너로 인식하게 된다.
범용재 영업의 중요한 질문이 “오늘 얼마에 팔 수 있는가”라면 고부가재 영업의 중요한 질문은 “3년 뒤에도 이 고객의 설계도 안에 우리 소재가 들어가 있을 것인가.”다.
철강 제조사의 진짜 고부가가치는 제철소에서 제품이 만들어지는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 제품이 고객의 설계에 들어가고, 생산라인에서 검증되고, 다음 세대 제품에서도 다시 선택될 때 비로소 만들어진다.
고부가 철강 영업의 경쟁은 가격표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고객의 설계도에 자신의 이름 없는 소재를 집어넣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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