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작품은 실제 철강시장 자료를 모티프로 창작한 픽션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일부 기업·사건은 허구이며, 실제 기업·단체·사건과 관련이 없다. 실제 기업명은 공개된 시장정보와 가격정책을 설명하기 위한 범위에서만 사용했다.
부제: 두 달 뒤의 수입재가 오늘의 외상매출금을 흔든 날
2026년 8월 31일 월요일 | 가람스틸 판재영업부·인천 코일센터
월요일의 출하보류
월요일 오전 7시 42분, 가람스틸 인천 코일센터의 출하 게이트 앞에서 첫 번째 트럭이 멈췄다. 기사에게 건네진 출고지시서에는 80톤이 찍혀 있었지만 창고 전산에는 붉은색 출하보류 표시가 떠 있었다. 구매처의 전월 외상대금이 아직 입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판매가격은 국산 정품 기준 톤당 94~95만원, 수입대응재는 92~93만원, 수입재는 90~91만원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날 회사가 가장 먼저 확인한 숫자는 가격이 아니라 미수금이었다.
판재영업팀장 윤도현은 노란 안전선을 넘지 않은 채 창고 쪽을 바라봤다. 코일은 움직일 준비가 돼 있었고 돈만 움직이지 않았다. 휴가철이 끝나면 주문이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는 이미 희미했다. 더 곤란한 것은 9월 말~10월 사이 도착할 동남아산 열연이었다. 원자료에는 530~535달러 CFR 수준에서 약 4만톤 계약이 이뤄진 것으로 추정돼 있었다. 아직 바다 위에도 오르지 않은 가격이 국내 고객의 흥정 기준으로 먼저 도착하고 있었다.
“팀장님, 동성기공에서 출하 풀어달라고 합니다. 오늘 못 받으면 자기들 라인이 선다고요.” 영업사원 민재가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미수는?” 윤도현이 물었다.
“지난달분 일부가 아직입니다. 오늘 오후 입금하겠답니다.”
재무팀 과장 서지연이 뒤에서 바로 끼어들었다. “오후라는 말만 세 번째입니다. 지금 출하하면 우리 여신한도 넘습니다.”
민재가 낮게 말했다. “그렇다고 막으면 다른 데서 사겠죠. 수입재 90~91이 시장에 깔려 있습니다.”
지연은 표정도 바꾸지 않았다. “다른 데서 살 수 있으면 왜 우리한테 아침부터 전화했을까요?”
윤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창고 천장 크레인이 코일 하나를 들어 올리는 소리가 울렸다. 물건은 움직였고 계약은 멈춰 있었다.
가격회의가 현금회의로 바뀌다
오전 9시, 영업부 회의는 가격회의로 시작했다가 현금회의로 바뀌었다. 구매팀 박선우가 환율 화면을 띄웠다. 7월 중순 1,470원대 후반이던 원·달러 환율은 8월 하순 1,370~1,380원대로 낮아져 있었다. 환율이 내려가자 수입재의 원화 환산 경쟁력은 더 좋아졌지만 기존 고가재고를 안고 있는 유통사에는 그 변화가 곧바로 이익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동남아 530~535달러가 그대로 들어온다고 치면, 기존 고가재고와 차이가 더 벌어집니다.” 선우가 말했다.
윤도현이 물었다. “그럼 지금 더 사야 합니까, 안 사야 합니까?”
선우는 화면을 확대했다. “싸졌다는 이유만으로 사면 안 됩니다. 도착할 때 우리가 가진 재고가 얼마나 남아 있을지가 먼저입니다. 신규 저가재고가 들어와도 기존 고가재고가 창고에 남아 있으면 평균원가가 생각만큼 내려가지 않습니다.”
지연이 재고연령표를 밀었다. “45일 넘긴 열연이 늘었습니다. 가격이 떨어져서 손실인 게 아니라 회전일수가 늘어 금융비용이 쌓이는 게 더 큽니다. 외상매출금까지 늦어지면 한도는 두 번 눌립니다.”
민재가 반박했다. “그래도 거래를 줄이면 매출이 더 줄죠. 월말 숫자도 맞춰야 합니다.”
“매출이 아니라 회수입니다.” 지연이 말했다. “현금이 안 돌아오면 530달러도 못 삽니다. 싸게 살 기회가 와도 돈이 묶여 있으면 기회가 아닙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윤도현은 가격표와 채권표를 나란히 놓았다. 같은 열연을 두고 영업은 판매단가를 보고, 구매는 도착원가를 보고, 재무는 돈이 돌아오는 날짜를 보고 있었다. 어느 숫자 하나만 맞는다고 거래가 완성되는 시장이 아니었다.
두 달 뒤 가격으로 오늘 흥정하다
그때 윤도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동성기공 구매부장이었다.
“윤 팀장, 우리 오늘 80톤 꼭 필요합니다. 대신 가격은 수입재 기준으로 다시 봅시다. 10월적이 530이면 지금 94는 너무 높아요.”
윤도현은 웃지 않고 답했다. “두 달 뒤 가격으로 오늘 물건을 사시겠다는 겁니까?”
“시장이라는 게 원래 먼저 움직이지 않습니까? 우리도 기다리면 싸질 것 같은데 굳이 지금 비싸게 살 이유가 없잖아요.”
윤도현은 잠깐 창고 쪽을 봤다. “맞습니다. 그래서 결제도 먼저 움직여야 합니다. 오늘 오전 미수금 절반 입금, 나머지는 일주일 안에 정리하면 40톤 먼저 내겠습니다.”
“80톤 필요한데 40톤이요?”
“가격을 깎는 대신 수량을 나눕시다. 오늘 필요한 만큼은 보장하고, 나머지는 결제 확인 뒤 이어가겠습니다.”
“그 조건이면 다른 데 알아볼 수도 있습니다.”
“알아보셔도 됩니다. 다만 오늘 바로 출하 가능한 재고와 두 달 뒤 도착할 물건은 같은 상품이 아닙니다.”
통화가 끝난 뒤 민재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저쪽이 화낼 겁니다.”
윤도현은 출하창을 보며 말했다. “화내는 것과 돈을 안 주는 건 다른 문제야. 고객을 지키는 것과 회사 현금을 넘겨주는 것도 다른 문제고.”
전환점, 싼 오퍼의 늦어진 시간
정오 무렵 상황이 한 번 뒤집혔다. 구매팀에 동남아 오퍼 조건 변경 연락이 들어왔다. 선적 가능 시점이 늦어질 수 있다는 메시지였다. 가격은 그대로였지만 일정이 흐려졌다. 윤도현은 그것이 시장에서 얼마나 큰 차이인지 알고 있었다. 싼 물건도 제때 도착하지 않으면 싸지 않다. 생산라인을 멈추게 하는 하루는 톤당 몇 달러의 차이보다 비쌀 수 있었다.
선우가 말했다. “이러면 고객들이 말하는 ‘10월의 싼 가격’이 실제로는 10월에 없을 수도 있습니다. 도착시점이 밀리면 기존 재고의 역할이 달라집니다.”
“그걸 고객한테 그대로 말하면 협박처럼 들려.” 윤도현이 답했다.
“그럼 어떻게 하죠?”
“가격이 아니라 납기를 팝시다.”
오후부터 가람스틸은 견적서 형식을 바꿨다. 단가 아래에 ‘즉시 출하 가능’, ‘7일 내 출하’, ‘도착재 연동’ 세 구간을 적었다. 같은 열연이라도 고객이 필요로 하는 시간에 따라 거래조건을 달리했다. 단순히 가장 싼 단가를 제시하는 대신, 어느 시점에 어떤 물량을 확정할 수 있는지 보여주기로 한 것이다.
동성기공에는 40톤 즉시 출하, 미수 일부 입금 후 추가 40톤을 잡아두는 조건을 제시했다. 민재는 견적서를 보내고도 한동안 메신저 화면을 바라봤다. 읽음 표시는 떴지만 답은 없었다.
40톤의 결정
오후 2시 18분, 입금 알림이 떴다. 전액은 아니었다. 그러나 약속한 절반이 들어왔다.
지연이 모니터를 보며 말했다. “이 정도면 40톤 출하 가능합니다. 추가 물량은 나머지 결제 일정만 확약 받으면 됩니다.”
민재가 웃었다. “그럼 거래는 살린 겁니까?”
윤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거래를 살린 게 아니라 회사가 끌려가지 않을 선을 정한 거지.”
출하장에서는 코일을 싣는 쇳소리가 커졌다. 80톤이던 지시서는 40톤으로 줄었지만 이번에는 전산의 빨간 보류 표시가 사라졌다. 운전기사는 시동을 걸었고, 창고반장은 무전기로 출차 순서를 불렀다.
퇴근 직전 윤도현은 다음 달 구매계획을 축소했다. 신규 수입계약은 전면 중단하지 않되 기존 고가재고의 회전일수가 목표 범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확인한 뒤 추가 발주하기로 했다. 또한 고객별 가격할인 승인 기준에 결제기일과 즉시출하 가능 여부를 새로 넣었다. 가격을 내리는 대신 수량, 납기, 결제조건을 조합해 거래를 설계하기로 한 것이다.
결정의 대가는 즉각적이었다. 그날 매출은 원래 계획보다 줄었다. 영업사원 몇 명은 경쟁사에 물량을 빼앗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구매팀도 530달러대의 기회를 놓칠 수 있다고 걱정했다. 하지만 회사의 여신한도는 넘지 않았고 미수금 일부가 실제 현금으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530달러라는 미래 가격이 오늘의 회사를 끌고 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윤도현은 마지막 출하 트럭의 후미등이 게이트를 빠져나가는 것을 봤다. 시장은 두 달 뒤를 말했지만 회사는 오늘 밤 은행계좌에서 살아야 했다. 월요일의 결정은 40톤을 덜 파는 선택처럼 보였지만, 그가 지키고 싶었던 것은 다음 거래를 할 수 있는 회사의 체력이었다.
퇴근하려던 순간 민재가 다시 문을 열었다. 동성기공에서 나머지 40톤의 출하예약을 유지해 달라는 메시지가 왔다. 단, 경쟁사 가격을 확인한 뒤 최종 확정하겠다는 조건이었다. 민재는 ‘이 정도면 잡아둘 만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고, 윤도현은 곧바로 재고를 묶지 않았다. 대신 오후까지 받은 입금액, 남은 채권, 다음 주 출하계획을 함께 놓고 예약 유효시간을 다음 날 오전까지로 제한했다. 팔리지 않은 재고를 특정 고객의 말 한마디로 묶어두면 다른 현금 거래를 놓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지연은 그 결정에 동의하면서도 한 가지 조건을 더 붙였다. 예약을 유지하려면 상대가 잔여 결제일을 이메일로 확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민재는 고객이 불쾌해할 수 있다고 했지만, 윤도현은 ‘말로 한 약속과 회계가 인식하는 약속은 다르다’고 답했다. 세 사람은 그날 처음으로 판매가능재고와 예약재고를 별도 칸으로 나누기로 했다. 작은 장부 수정이었지만, 하락장에서는 이런 구분 하나가 다음 주의 현금흐름을 바꿀 수 있었다.
창고 밖에서는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코일 표면에 물이 닿지 않도록 셔터가 내려갔고, 안쪽 조명 아래 남은 재고들이 길게 늘어섰다. 윤도현은 그 줄을 보며 오늘 팔지 않은 40톤이 손실인지 선택권인지 아직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가격이 내려가는 시장에서는 재고를 많이 가진 사람이 유리한 것이 아니라, 어느 재고를 누구에게 언제 내줄지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 유리했다.
그날의 가격
| 품목 | 가격 | 주간 변동 |
|---|---|---|
| 국산 열연 정품 | 94~95만원/톤 | 7월 말 97만원 대비 하락 |
| 열연 수입대응재 | 92~93만원/톤 | 원자료상 별도 미제시 |
| 열연 수입재 | 90~91만원/톤 | 남부 일부 80만원 후반 |
| 동남아 열연 오퍼 | 530~535달러/톤 CFR | 10월적 중심 |
※ 시장자료 기준. 소설 속 거래처·여신·출하조건은 허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