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작품은 실제 철강시장 자료를 모티프로 창작한 픽션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일부 기업·사건은 허구이며, 실제 기업·단체·사건과 관련이 없다. 실제 기업명은 공개된 시장정보와 가격정책을 설명하기 위한 범위에서만 사용했다.
부제: 가격을 올리려는 제강사와 물량을 비우려는 유통이 같은 야적장에서 충돌했다
2026년 9월 10일 목요일 | 경기 남부 철근 하치장·여신회의·건설현장
싼 가격에도 트럭이 오지 않았다
목요일 오전 7시 25분, 세광철재 하치장에는 철근이 쌓여 있었지만 상차 대기 트럭은 두 대뿐이었다. 국산 철근 SD400·10mm 유통가격은 하치장 도착도 기준 톤당 84만5천원 안팎까지 내려왔고, 수입 철근은 79만원 수준까지 낮아져 80만원선이 무너졌다. 가격만 보면 구매가 늘어야 할 것 같았지만 현장은 조용했다. 판매부장 장민호에게 가장 불길한 것은 가격 하락보다 주문의 부재였다.
물류반장 정성진이 말했다. “어제 취소된 물량 아직 그대로입니다. 오늘도 두 현장에서 납기 연기 연락 왔습니다.”
민호가 물었다. “가격 더 내려주면 가져간답니까?”
“그 얘기도 없습니다. 그냥 공정이 늦어진답니다.”
여신팀장 문지혜가 사무실에서 나왔다. “가격 낮춘다고 외상까지 늘리면 안 됩니다. 지난달 미수 회수도 늦어지고 있어요.”
영업대리 고태수는 답답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뭘 팔라는 겁니까? 경쟁사들은 물량 빼려고 더 낮게 던집니다.”
민호는 하치장 끝까지 이어진 철근 묶음을 봤다. 수요가 없을 때 싼 가격은 판매촉진제가 아니라 서로의 마진을 깎는 칼이 될 수 있었다.
제강사는 올리고 시장은 내렸다
오전 9시 반 업계 가격회의가 열렸다. 제강사들은 유통가격 방어를 위해 고시가격을 올리고 있었다. 원자료에는 동국제강이 9월 첫째 주 유통향 고시가격을 톤당 89만원으로, 현대제철이 88만원으로 제시했고 14일부터 91만원 인상 방침을 세운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제강사는 유통향 출하 중단까지 선택하며 시장가격 방어에 나섰다.
태수가 말했다. “메이커는 89, 88을 말하는데 시장은 84만5천입니다. 이 차이를 누가 메웁니까?”
지혜가 답했다. “우리가 외상으로 메우면 안 됩니다.”
구매팀 과장 임찬호가 말했다. “제강사 출하가 줄면 재고가 빨리 빠질 수도 있습니다. 지금 너무 싸게 팔면 다음 주 물건이 부족해질 수 있어요.”
민호가 물었다. “수요가 살아날 신호는 있습니까?”
찬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가격 방어는 강해졌지만 건설현장의 실제 주문은 여전히 약했다.
민호는 화이트보드에 두 숫자를 썼다. 84.5와 89. “우리가 오늘 결정해야 하는 건 어느 숫자가 맞느냐가 아닙니다. 어떤 고객에게 어떤 조건으로 물량을 줄 것인지예요.”
태수가 말했다. “그러면 대형 거래처를 먼저 잡죠.”
지혜가 고개를 저었다. “대형 거래처가 회수가 늦으면 소형 현금 거래보다 위험합니다.”
90일 외상보다 작은 현금 주문
점심 직후 오래 거래한 건설자재상이 300톤을 요청했다. 단가는 시장 하단을 요구했고 결제는 90일이었다. 동시에 소규모 가공업체에서 70톤을 현금으로 사고 싶다는 전화가 왔다.
태수가 말했다. “300톤을 놓치면 이번 달 실적이 크게 깨집니다.”
지혜가 즉시 계산기를 두드렸다. “90일이면 여신한도 거의 다 씁니다. 회수 지연되면 다음 매입도 못 합니다.”
민호가 물었다. “70톤 현금은 운임 조건이 어떻죠?”
“두 번 나눠 보내달랍니다. 운임은 우리가 일부 부담해야 합니다.”
성진이 끼어들었다. “그래도 야적장 자리 비우는 데는 도움이 됩니다.”
민호는 300톤 주문처에 전화를 걸었다. “90일은 어렵습니다. 45일이면 물량 우선 배정하겠습니다.”
상대가 말했다. “다른 데는 90일 해줍니다.”
“그러면 그쪽 물량을 먼저 쓰셔도 됩니다. 저희는 급한 물량을 단기결제로 책임지겠습니다.”
“거래 줄이자는 겁니까?”
“거래를 오래 하자는 겁니다.”
통화를 끊은 뒤 민호는 70톤 현금 주문을 승인했다. 운임 부담으로 마진은 줄었지만 돈은 바로 들어왔다. 그 순간 실적표의 톤수보다 계좌의 현금이 더 중요한 날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가격 방어보다 고객 구조를 바꿨다
오후 4시 회사는 거래처 분류 기준을 바꿨다. 월간 구매량보다 회수기간, 주문확정성, 현장 납기 긴급도를 먼저 보도록 했다. 장기 외상 고객은 한도를 줄이고 현금·단기결제 고객에게 재고 우선권을 주기로 했다. 제강사 출하제한 가능성에 대비해 모든 재고를 던지지는 않되, 낮은 회전율의 규격은 분할 판매로 정리했다.
찬호가 말했다. “만약 고시가격이 시장에 먹히면 84만5천에 판 물량이 아쉬울 수 있습니다.”
민호가 답했다. “그때는 가격이 오른 걸 아쉬워하면 됩니다. 지금은 안 팔리고 돈도 못 받는 게 더 무섭습니다.”
지혜는 회의록에 ‘매출목표’ 대신 ‘회수가능 매출’이라는 표현을 넣었다. 태수는 처음엔 못마땅했지만 오후 늦게 대형 고객 한 곳의 입금이 또 지연됐다는 연락을 받고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그날 세광철재는 대형 주문 일부를 놓쳤고 운임비도 더 부담했다. 대신 야적장 재고가 조금 줄었고 현금이 들어왔다. 가격표에는 84만5천원이 찍혀 있었지만 회사가 지키려 한 숫자는 그보다 뒤에 있었다. 회수일, 여신한도, 재고일수였다.
해가 기울 무렵 하치장 입구로 형강 트럭이 들어왔다. 국산 H형강 역시 116~118만원대로 내려와 있었다. 다음 날은 또 다른 가격 격차가 회사의 선택을 시험할 차례였다.
출하를 멈춘 쪽과 재고를 비운 쪽
오후 5시 반, 제강사 출하 제한 소식이 다시 시장에 퍼졌다. 태수는 이것이 가격 반등의 신호일 수 있다며 남은 재고를 아끼자고 주장했다. 반면 성진은 야적장 공간과 예정 입고를 이유로 일정 물량은 계속 빼야 한다고 했다. 민호는 두 사람을 야적장으로 데리고 나갔다. 해 질 무렵 철근 묶음 사이의 통로는 좁았고, 이미 다음 주 입고 예정표가 걸려 있었다.
“여기서 가격 반등을 기다리면 며칠 버틸 수 있죠?” 민호가 물었다.
성진이 답했다. “입고 조정 없으면 사흘 정도입니다.”
“그 뒤는?”
“바깥 적치해야 합니다. 작업 효율 떨어지고 안전관리도 어려워집니다.”
찬호가 말했다. “그렇다고 지금 싸게 팔면 제강사가 가격을 올렸을 때 손해입니다.”
민호는 철근 묶음을 손으로 두드렸다. “이 물건이 사흘 뒤에도 여기 있으면 그때부터는 가격 말고 공간비용이 생깁니다.”
지혜가 덧붙였다. “그리고 재고로 돈이 묶여 있으면 제강사 가격이 올라 새 물건을 사야 할 때 현금이 없습니다.”
결국 회사는 재고를 두 그룹으로 나눴다. 회전이 빠른 규격과 현금 거래가 붙은 물량은 계속 출하하고, 향후 공급 제한에 대비해 핵심 규격은 최소 재고를 남겼다. 전량 방출도, 전량 보유도 하지 않았다. 민호는 이를 ‘바닥 확인용 재고’라고 불렀다.
그날 저녁 작은 건설현장에서 40톤 긴급 주문이 들어왔다. 단가는 시장 하단을 요구했지만 현금결제였다. 태수는 “이 정도 물량은 실적에 도움이 안 된다”고 말했지만 민호는 승인했다. “오늘은 큰 매출보다 확실한 회수가 중요해.”
현장소장은 다음날 오전 반입을 요구했다. 성진은 추가 배차비가 든다고 했고, 민호는 절반을 회사가 부담하기로 했다. 다시 마진이 줄었다. 그러나 야적장 공간이 비었고 현금이 바로 들어왔다.
태수는 퇴근 전 실적표를 보며 말했다. “이번 달 톤수는 정말 안 나올 것 같습니다.”
민호가 답했다. “톤수로만 보면 실패할 수도 있어. 하지만 미수금이 줄고 재고가 돌아가면 다음 달 살아 있을 수 있어.”
하락장의 철근은 가격정책만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제강사는 출하를 줄여 가격을 지키려 했고 유통은 재고를 줄여 현금을 지키려 했다. 서로 반대 방향처럼 보였지만 둘 다 수요 절벽 앞에서 버티는 방식이었다. 민호는 그 사실을 회의록 마지막 줄에 적었다. ‘가격을 지키는 것과 회사를 지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민호는 마지막으로 다음 주 영업회의 자료에 ‘가격 전망’ 대신 ‘현금화 가능 재고’를 첫 항목으로 넣으라고 지시했다. 판매부서가 가격을 맞히는 조직이 아니라 재고와 채권을 함께 움직이는 조직이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태수는 자료 제목을 바꾸면서 잠시 멈췄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장이 반등하면 다시 공격적으로 팔 수 있다. 그러나 반등 전에 현금이 마르면 그 기회조차 잡지 못한다. 그 단순한 사실이 84만5천원이라는 숫자보다 무거웠다.
그날의 가격
| 품목 | 가격 | 주간 변동 |
|---|---|---|
| 국산 철근 SD400·10mm | 84만5천원/톤 안팎 | 주간 하락 |
| 수입 철근 | 79만원/톤 수준 | 80만원선 하회 |
| 제강사 유통향 고시가격 | 88~89만원/톤 | 시장 방어 목적 인상 |
※ 가격과 시장상황은 선택한 K스틸 2026-09-04 원자료 범위에서 사용했으며, 소설 속 기업·인물·거래조건·사내 판단은 허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