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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계절 ㉜ — 94만원의 바닥

강철의 계절 ㉜ — 94만원의 바닥

이 작품은 실제 철강시장 자료를 모티프로 창작한 픽션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일부 기업·사건은 허구이며, 실제 기업·단체·사건과 관련이 없다. 실제 기업명은 공개된 시장정보와 가격정책을 설명하기 위한 범위에서만 사용했다.


부제: 내려가는 가격보다 더 무서운 것은 멈춰 선 회전이었다


2026년 9월 7일 월요일 | 인천 코일센터·영업관리실·항만 배차장


월요일 아침, 가격표가 한 칸 내려갔다

오전 7시 35분, 해원스틸 인천 코일센터의 출하관리 화면에서 국산 열연 정품 기준가격이 톤당 94만원으로 수정됐다. 수입대응재는 92만원, 수입재는 90만원. 지난주보다 각각 1만원 안팎 낮아진 시장의 숫자가 모니터에 떠 있었지만, 영업팀장 이강민의 시선은 가격표가 아니라 출하대기 목록의 회색 줄에 멈췄다. 금요일에 잡혔던 주문 세 건이 월요일 아침까지 확정되지 않았다. 가격이 내려갔는데도 고객은 사지 않았다.


창고반장 손태호가 안전모를 벗으며 말했다. “팀장님, A동 3열 코일은 지난주부터 그대로입니다. 자리를 안 비우면 수요일 입고분을 다른 구역에 놓아야 합니다.”

“얼마나 오래됐죠?” 강민이 물었다.

“오래된 건 50일 넘었습니다.”


재무팀 이수정 과장이 재고연령표를 펼쳤다. “평균원가로 보면 아직 손실이 크지 않아 보입니다. 그런데 이대로 보유일수가 늘면 금융비용이 먼저 먹고 들어갑니다.”


영업사원 박준은 휴대전화를 들어 보였다. “거래처들은 90만원짜리 수입재 얘기만 합니다. 국산 94를 내면 ‘다음 주 더 내려가는 것 아니냐’고 묻고요.”

강민은 창고 밖으로 지나가는 지게차를 바라봤다. 시장은 1만원이 내려갔지만 현장에서는 주문 자체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가격 하락보다 회전 정지가 더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재고는 팔리지 않는 순간부터 상품이 아니라 자금의 형태를 바꾼 부채가 되기 시작했다.


가격을 지킬 것인가, 회전을 살릴 것인가

오전 9시 영업회의에는 구매팀과 재무팀까지 들어왔다. 구매팀장 서준혁은 중국과 글로벌 가격 반등, 4분기 국내 열연 생산라인 보수 가능성을 언급했다. 원자료 역시 9월 초 국내 열연시장이 당장 반등하지는 못했지만 중국 가격과 원료가격 상승, 4분기 공급 감소 가능성을 주목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기대가 오늘의 재고를 팔아주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준혁이 말했다. “지금 추가 매입을 너무 줄이면 10~11월에 공급이 빠듯해질 때 물건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수정이 바로 되물었다. “그때까지 지금 재고가 남아 있으면요?”

“그건 영업이 회전을 만들어야죠.”


박준이 목소리를 높였다. “시장에 90만원 수입재가 있는데 국산을 94에 고정해 놓고 어떻게 회전을 만듭니까?”

강민이 손을 들었다. “가격만 내리면 회전이 생긴다는 보장은 있습니까?”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그는 지난달 할인 판매 자료를 띄웠다. 일부 거래는 단가를 낮춰도 물량이 크게 늘지 않았다. 싸게 팔아도 고객이 더 싼 가격을 기다리는 국면이었다.

“그러면 뭘 하자는 겁니까?” 박준이 물었다.

“재고를 한 덩어리로 보지 말자. 오래된 코일과 신규 코일, 현금회수 빠른 거래처와 느린 거래처를 갈라서 보자.” 강민이 말했다. “가격을 일괄로 내리는 대신 오래된 재고만 조건부로 움직입니다.”


수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금결제나 30일 이내 회수 거래면 할인 승인폭을 넓힐 수 있습니다. 60일 이상 외상은 그대로 두고요.”

준혁은 팔짱을 꼈다. “그러면 저가 판매가 시장가격으로 굳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규격과 결제조건을 붙이는 겁니다. 시장 전체 가격을 내리는 게 아니라 특정 재고를 회수하는 거래로 만듭시다.”


오후 한 시, 수입재 90만원의 전화

점심 직후 성진기계 구매부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월말까지 필요한 열연 물량이 있었지만 단가를 수입재 수준으로 맞춰달라는 요구였다.

“이 팀장, 수입재가 90인데 국산 94는 차이가 큽니다. 92면 오늘 결정하겠습니다.”


강민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결제는 기존 60일 그대로입니까?”

“그 조건은 바꾸기 어렵죠.”

“그럼 92는 어렵습니다.”

“다른 데는 맞춰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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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은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 “대신 45일 넘은 재고 규격으로 선택하시면 93, 그리고 30일 결제로 줄이면 92까지 검토하겠습니다. 즉시 출하도 보장하죠.”

상대가 웃었다. “가격 깎으러 전화했더니 결제조건부터 깎자는군요.”

“지금은 가격과 시간이 같은 돈입니다.”


통화가 끝난 뒤 박준이 물었다. “저쪽이 받아들일까요?”

“모르지. 하지만 92에 팔고 60일 뒤에 돈을 받으면 우리한테는 92가 아니야.”


오후 2시 반 성진기계에서 회신이 왔다. 30일 결제를 받아들이는 대신 92만원 조건의 물량을 절반만 확정하겠다고 했다. 강민은 승인했다. 매출 총액은 줄었지만 오래된 재고가 빠지고 회수기간이 짧아졌다. 그 순간 그는 가격보다 거래구조를 바꾸는 편이 낫다는 확신을 얻었다.


바닥은 가격이 아니라 회전에서 확인된다

퇴근 직전 강민은 구매팀에 다음 주 입고 예정 물량의 일부를 연기할 수 있는지 확인해 달라고 했다. 신규 저가재를 무조건 따라 사지 않고, 기존 재고 회전이 목표 범위로 들어올 때까지 추가 매입을 분할하기로 했다. 동시에 영업팀에는 견적서에 재고연령과 결제기일을 내부 승인항목으로 넣으라고 지시했다.


준혁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4분기 공급이 정말 빠듯해지면 오늘 줄인 매입이 아쉬워질 수도 있습니다.”

강민이 답했다. “그때 부족하면 다시 사면 됩니다. 지금은 남아 있는 물건을 돈으로 바꾸는 게 먼저예요.”


수정은 회의록 마지막 줄에 ‘가격 방어보다 현금 회전 우선’이라고 적었다. 그날 해원스틸은 계획했던 매출의 일부를 포기했고, 할인 조건 때문에 톤당 마진도 줄었다. 대신 50일을 넘긴 재고 일부가 움직였고 매출채권 만기도 짧아졌다.


해가 진 뒤 창고 문이 닫힐 때 강민은 94만원이라는 숫자를 다시 봤다. 그것이 바닥인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시장의 진짜 바닥은 더 이상 팔리지 않는 가격이 아니라, 그 가격에서도 재고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에 생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후판팀에서는 반대로 가격을 낮추지 않고 납기를 지키기 위해 물량을 묶어두겠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같은 철강시장 안에서도 살아남는 방식은 제품마다 달랐다.


숫자 밖에서 벌어진 두 번째 협상

오후 5시가 가까워졌을 때 강민은 창고 사무실에서 다시 거래처 명단을 펼쳤다. 같은 94만원짜리 코일이라도 고객마다 의미가 달랐다. 어떤 고객은 월 500톤을 사지만 결제일이 늘 늦었고, 어떤 고객은 80톤밖에 사지 않아도 현금 흐름을 망치지 않았다. 그는 영업사원들에게 거래처를 매출액 순서가 아니라 회수일수 순서로 다시 정렬하라고 했다. 박준은 처음에는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큰 거래처를 작은 거래처보다 뒤로 두는 표는 영업부가 익숙하게 보던 화면이 아니었다.


“팀장님, 이렇게 하면 우리 핵심 고객이 뒤로 밀립니다.” 박준이 말했다.

“핵심 고객의 기준을 다시 묻는 거야. 많이 사는 곳이 핵심인지, 약속한 날 돈을 주는 곳이 핵심인지.”


수정이 옆에서 말했다. “둘 다여야 진짜 핵심이죠.”

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둘 다 아닌 거래처를 지금부터 구분하자는 겁니다.”


그날 저녁 세광모터라는 중소 고객이 60톤을 문의했다. 단가는 94만원을 받아들이겠지만 다음 날 오전 첫차 출하가 조건이었다. 박준은 마진이 더 나은 거래라며 반색했다. 그러나 창고에서는 그 규격이 A동 안쪽에 있어 상차 순서를 바꿔야 했다. 손태호는 야간 지게차 작업이 필요하다고 했다. 강민은 1만원을 할인하는 대신 야간 작업비를 회사가 부담해 납기를 맞추기로 했다. 가격을 깎지 않고 서비스 비용을 쓴 셈이었다.


수정이 계산서를 보며 말했다. “톤당으로 보면 할인보다 비용이 적습니다. 게다가 현금결제라 회수 위험도 없습니다.”

박준이 웃었다. “오늘 계속 가격을 안 깎고 다른 데 돈을 쓰네요.”


강민은 답했다. “하락장에서는 아무 데나 깎으면 그 가격이 시장이 돼. 대신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비용을 써야 해.”


이 결정으로 하루 계획은 다시 바뀌었다. 창고팀은 상차 순서를 조정했고, 구매팀은 신규 입고 시간을 늦췄다. 영업팀은 고객별 ‘가격·납기·결제’ 세 칸을 동시에 적는 견적 양식을 만들었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가격이 첫 칸이었지만, 이제는 결제와 납기가 같은 크기로 표시됐다.


밤 8시가 넘어 마지막 코일이 트럭에 실리자 손태호가 말했다. “가격은 떨어졌는데 오늘은 창고가 더 바빴네요.”

강민은 웃었다. “그게 우리가 보고 싶었던 신호입니다. 가격이 아니라 회전이 살아나는 신호.”


그는 월요일 매출이 예상보다 적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회사 계좌에는 현금이 들어왔고 오래된 재고가 줄었다. 저가 수입재가 여전히 시장을 누르고 있었지만 적어도 회사는 그 가격에 끌려가지만은 않았다. 94만원의 바닥은 시장이 정해주는 숫자가 아니라, 회사가 손실과 현금 사이에서 선택한 운영선이 되고 있었다.


그날의 가격

품목가격주간 변동
국산 열연 정품94만원/톤전주 대비 약 1만원 하락
수입대응재92만원/톤전주 대비 약 1만원 하락
수입 열연90만원/톤전주 대비 약 1만원 하락

※ 가격과 시장상황은 선택한 K스틸 2026-09-04 원자료 범위에서 사용했으며, 소설 속 기업·인물·거래조건·사내 판단은 허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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