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작품은 실제 철강시장 자료를 모티프로 창작한 픽션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일부 기업·사건은 허구이며, 실제 기업·단체·사건과 관련이 없다. 실제 기업명은 공개된 시장정보와 가격정책을 설명하기 위한 범위에서만 사용했다.
부제: 형강
2026년 9월 둘째 주, 수도권 H형강 유통·가공업체
이상신호
금요일 오전 일곱 시, H형강 유통·가공업체의 절단공장에는 평소보다 일찍 영업팀이 모였다. 국산 중소형 H형강 유통시세가 116만~117만원까지 내려온 상황에서 17일부터 제강사가 판매가격을 5만원 올리겠다는 방침을 내놨기 때문이다. 가격이 오르기 전에 사야 한다는 사람과, 인상 발표가 실제 시장에 먹히지 않을 것이라는 사람이 회사 안에서도 정확히 반으로 갈렸다.
영업이사 최병준이 먼저 말했다. “지난번 인상도 시장이 다 못 따라갔습니다. 이번에도 121만원 이상을 목표로 해도 수요가 약하면 소용없어요.” 구매팀 과장 송유라는 반대했다. “그래도 17일 이후 출고 기준이 바뀌면 오늘 확보한 재고가 방어막이 됩니다.” 공장장 민성호는 다른 걱정을 했다. “재고를 늘리면 야드가 찹니다. 지금도 프로젝트용 대형 규격이 오래 누워 있어요.”
재무팀장 정우석은 재고 에이징 자료를 펼쳤다. “60일 넘은 재고가 지난달보다 늘었습니다. 가격 인상만 보고 추가 매입하면 장부가가 올라갑니다.” 유라가 말했다. “하지만 국산이 116~117일 때 필요한 규격을 잡아두면 121 이상으로 올라갔을 때 마진이 생깁니다.” 우석은 고개를 저었다. “올라간다는 가정이 틀리면요?”
조건의 충돌
오전 아홉 시, 플랜트 제작업체에서 문의가 들어왔다. 다음 달 착공 물량으로 중소형 H형강 300톤을 검토 중인데 아직 발주 확정은 아니었다. 병준은 거래처에 물었다. “이번 주 안에 발주서 가능합니까?” 상대는 답했다. “가격이 더 떨어질 것 같아서 다음 주까지 보겠습니다.” 병준이 말했다. “17일 이후 가격 정책이 바뀔 수 있습니다.” “그 인상이 시장에 먹힐지는 모르잖아요.” 그 말은 사내 회의에서 나온 문장과 똑같았다.
다른 거래처는 정반대였다. 물류창고 증축 현장 구매담당자가 “17일 전에 120톤만 먼저 잡아달라”고 요청했다. “가격이 오르기 전에 물량을 확보하고 싶습니다.” 병준이 물었다. “착공 확정입니까?” “기초공사는 들어갔습니다. 납기는 다음 주 후반입니다.” 이 주문은 수요의 실체가 있었다.
유라는 두 거래를 비교하며 말했다. “우리가 재고를 잡을 이유는 두 번째 같은 주문 때문입니다. 첫 번째처럼 막연한 문의를 믿고 사면 안 됩니다.” 성호도 동의했다. “규격도 중요합니다. 잘 나가는 중소형은 회전이 빠르지만 대형은 한번 잘못 잡으면 몇 달 갑니다.”
오후 한 시, 제강사 대리점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17일 가격 인상을 앞두고 주문이 몰릴 경우 일부 규격 배정이 빡빡할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유라는 즉시 매입안을 올렸다. 하지만 우석이 결재를 막았다. “수량을 30% 줄이세요. 대신 확정 주문이 있는 규격만 삽니다.” 유라가 반발했다. “그럼 상승 시점에 물량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부족하면 비싸게 사는 손실이고, 남으면 몇 달 금융비용을 떠안는 손실입니다. 지금은 후자가 더 큽니다.”
전환점
전환점은 오후 세 시였다. 오전에 가격을 더 보겠다던 플랜트 업체가 다시 전화를 했다. “경쟁사 견적이 올라갈 수 있다는 얘기가 나와서 150톤만 선발주하겠습니다.” 병준이 물었다. “결제는?” “30% 선금, 잔금은 납품 후 30일.” 우석이 전화 내용을 듣고 말했다. “이 조건이면 재고를 잡을 근거가 생겼네요.”
최종 회의에서 회사는 투기성 선매입을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확정 주문과 선금이 있는 규격을 중심으로 평소보다 조금 높은 수준의 안전재고를 확보하고, 60일 초과 재고는 할인 판매하더라도 먼저 줄이기로 했다. 17일 이후 실제 유통가격이 121만원 이상으로 올라가는지 확인하기 전에는 추가 매입을 보류한다. 병준은 영업팀에 말했다. “가격 인상 발표를 뉴스처럼 보지 말고 주문서로 확인해. 고객이 실제로 서명하는지가 시장이야.”
성호는 야드 배치도도 바꿨다. 빠른 회전 규격은 출하동 가까이, 오래된 대형 규격은 별도 구역에 모아 할인판매 대상 목록으로 만들었다. “재고를 늘리더라도 무엇이 새 재고이고 무엇이 오래된 재고인지 섞지 맙시다.” 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17일 전에 사는 것보다 17일 뒤에도 팔 수 있는 걸 사는 게 중요하네요.”
저녁 무렵 첫 추가 매입분이 공장에 들어왔다. 트럭에서 내려오는 H형강을 보며 병준은 오전의 논쟁을 떠올렸다. 5만원 인상 발표는 강한 신호였지만 수요가 약한 시장에서는 신호만으로 가격이 움직이지 않는다. 확정 발주, 선금, 규격 회전, 재고 연령이 함께 움직일 때 비로소 주문서가 가격이 된다. 그는 다음 주 월요일 회의 제목을 미리 적어두었다. ‘121만원이 시장이 되었는가.’
토요일 오전에도 병준과 유라는 잠깐 회사에 나왔다. 17일이 가까워질수록 거래처 문의가 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의량은 늘었지만 실제 발주서는 그만큼 늘지 않았다. 유라가 말했다. “전화는 두 배인데 주문은 20% 정도밖에 안 늘었어요.” 병준이 웃었다. “그게 시장 심리와 실제 수요의 차이지.”
회사는 그 차이를 수치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문의는 참고지표, 확정 발주는 매입 근거, 선금은 가장 강한 매입 근거로 구분했다. 우석은 결재 규칙을 바꿨다. “가격 인상 전 선매입은 확정 수주량의 일정 배수까지만 허용합니다. 문의만 있는 물량은 근거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유라는 처음엔 답답해했지만 재고표를 보고 수긍했다.
야드에서는 오래된 대형 규격을 먼저 정리했다. 성호가 영업팀에 목록을 보내며 말했다. “이건 17일 인상과 상관없이 털어야 합니다. 새 재고 가격이 올라가도 오래된 재고가 남아 있으면 평균원가가 꼬입니다.” 병준은 일부 물량을 마진을 낮춰 판매했다. 손익표에는 손해처럼 보였지만 창고 공간과 금융비용을 확보하는 효과가 있었다.
한 거래처가 121만원 이상으로 오를 가능성을 이유로 선구매를 요청했다. 병준은 무조건 받지 않았다. “실제 착공일과 필요 규격을 보내주십시오. 발주 목적이 확인되면 배정하겠습니다.” 거래처는 처음엔 불편해했지만 자료를 보내왔다. 그 주문은 실제 수요였다. 반대로 가격차익을 기대한 재판매 문의는 거절했다.
17일 전날 저녁, 회사의 재고는 평소보다 조금 늘었지만 구성은 달라져 있었다. 잘 팔리는 중소형 규격 비중이 높고, 오래된 대형 규격은 줄었다. 확정 주문에 대응할 재고는 충분했지만 가격 상승만 기대한 과잉재고는 없었다. 우석이 말했다. “만약 인상이 실패해도 치명적이지 않은 수준입니다.” 유라는 대답했다. “성공하면 고객을 놓치지 않을 수준이고요.”
병준은 두 사람의 말을 들으며 이번 전략의 의미를 정리했다. 시장 방향을 맞히려 한 것이 아니라 어느 방향으로 가도 버틸 수 있는 재고를 만든 것이었다. 가격이 121만원 이상으로 올라가면 확보한 재고가 방어막이 되고, 다시 116~117만원으로 밀려도 과잉재고 손실이 제한된다.
그는 영업팀 단체메신저에 마지막 지시를 남겼다. ‘17일 이후 첫 거래가격을 확인하기 전까지 추가 선매입 금지. 확정 주문 우선 배정. 오래된 재고 우선 소진.’ 인상 발표보다 실제 거래가 중요하다는 원칙을 끝까지 지키기로 했다. 시장이 무엇을 말하든 회사의 답은 주문서와 입금표, 재고회전일수에서 확인될 것이었다.
가격 인상일이 다가오자 거래처마다 행동이 달라졌다. 실제 공사가 진행 중인 곳은 필요한 규격을 서둘러 확정했지만, 재판매 목적의 문의는 끝까지 발주서로 이어지지 않았다. 병준은 그 차이를 영업회의에서 보여주며 말했다. “전화량으로 시장을 읽으면 과열로 보이지만 발주서로 보면 아직 조심스럽다.”
유라는 제강사 주문도 두 단계로 나눴다. 확정수요 대응분은 즉시 주문하고, 추가 예상분은 인상 후 첫 주의 실거래를 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성호는 야드 공간을 미리 비워두되 아직 물건을 채우지는 않았다. “공간도 옵션입니다. 필요할 때 받을 수 있게 비워두는 거죠.” 우석은 그 말을 재무적인 선택권으로 받아들였다.
마지막 회의에서 병준은 목표를 수정했다. ‘인상 전에 최대한 싸게 사기’가 아니라 ‘인상 이후에도 팔 수 있는 재고만 확보하기’였다. 가격이 오른다면 확보한 재고가 이익을 만들고, 오르지 않는다면 과잉매입을 피한 것이 이익이 된다. 그는 직원들에게 말했다. “시장을 맞히는 것보다 틀려도 버티는 구조를 만드는 게 이번 주 일이다.”
17일 아침 첫 거래가 실제로 어떤 수준에서 형성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병준은 예상가격을 회의자료에서 지웠다. 대신 확정주문량, 선금 수령액, 30일 이내 회전 가능한 재고량을 적었다. 시장가격은 통제할 수 없지만 이 세 숫자는 회사가 통제할 수 있었다. 직원들은 그제야 인상 발표를 예측게임이 아니라 재고운영의 문제로 보기 시작했다.
이 판단은 다음 주 첫 거래와 재고회전 결과를 다시 확인해 조정하기로 했다.
현장에서는 이 결정을 일주일짜리 임시대응이 아니라 반복 가능한 운영원칙으로 남기기로 했다. 다음 실행 때는 실제 판매속도와 회수일, 재고연령을 비교해 기준을 다시 조정한다.
그날의 가격
| 품목 | 가격 | 주간 변동 |
|---|---|---|
| 국산 중소형 H형강 | 116~117만원/톤 | 전주 대비 1만원 하락 |
| 제강사 인상 목표 수준 | 121만원 이상/톤 | 17일 이후 인상 추진 |
| 수입 H형강 | 원자료상 별도 최신 수치 미제시 | 원자료상 별도 미제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