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작품은 실제 철강시장 자료를 모티프로 창작한 픽션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일부 기업·사건은 허구이며, 실제 기업·단체·사건과 관련이 없다. 실제 기업명은 공개된 시장정보와 가격정책을 설명하기 위한 범위에서만 사용했다.
부제: 냉연도금
2026년 9월 둘째 주, 수도권 가전강판 가공센터
이상신호
수요일 새벽 다섯 시 반, 물류팀장 김태성은 열차가 아니라 문자메시지에 깨었다. 남부권에서 올라오던 철송 물량이 또 지연됐다는 내용이었다. 냉연과 도금코일이 예정대로 들어오지 않으면 오후부터 두 개 슬리터 라인의 투입계획이 비었다. 문제는 창고에 재고가 없는 것이 아니라, 고객별로 필요한 폭과 표면등급이 다르다는 점이었다.
아침 회의에서 생산팀 대리 조하나는 말했다. “CR은 95에서 97만원 선 재고가 있습니다. 하지만 1.2밀리 GI는 고객 A사 규격이 오늘 오후면 끝납니다.” 영업팀 차장 배준석이 답했다. “GI는 시장이 113에서 114까지 올라와 있습니다. 지금 급하게 사면 지난달보다 비싸게 채워야 합니다.” 태성이 물었다. “HGI는?” “108에서 109 정도. 그쪽도 여유롭진 않습니다.”
재고관리 담당 오미선이 노트북 화면을 돌렸다. 같은 품목이어도 입고일에 따라 원가가 달랐다. 지난달 낮은 가격에 잡아둔 물량과 최근 매입분이 섞여 있었고, 오래된 재고는 특정 폭으로만 남았다. “총재고만 보면 문제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고객별 가용재고로 바꾸면 세 군데가 빨간색입니다.” 준석이 한숨을 쉬었다. “그럼 오늘부터 긴급조달이네.”
조건의 충돌
첫 번째 갈등은 가격이었다. 인근 유통상은 GI 코일을 바로 줄 수 있었지만 114만원을 요구했다. 준석이 전화로 말했다. “113에 맞춰주면 오늘 결제합니다.” 상대는 웃었다. “지금 수도권 입고가 꼬여서 그 가격은 어렵습니다. 필요하시면 114입니다.” “전량은 안 됩니다. 두 코일만.” “소량이면 더 어렵죠.” 준석이 전화를 끊고 말했다. “수요는 없다고들 하는데 필요한 규격만 비싸졌습니다.”
두 번째 갈등은 생산이었다. 하나는 슬리터 가동순서를 바꾸자고 했다. “A사 규격을 먼저 돌리고 B사는 내일 오전으로 미루면 오늘 필요한 GI를 절반만 사도 됩니다.” 영업팀은 반발했다. “B사 납기를 미루면 다음 분기 물량이 빠질 수 있어.” 하나가 말했다. “라인을 멈추면 A사도 B사도 못 나갑니다. 순서를 바꾸는 게 낫습니다.”
오전 열한 시, 품질팀 과장 이수현이 새 변수 하나를 들고 왔다. 기존 재고 중 한 코일의 표면 검사가 재확인 대상이라는 것이었다. “사용은 가능할 가능성이 높지만 오늘 바로 투입하긴 어렵습니다.” 태성이 물었다. “검사에 얼마나 걸립니까?” “두 시간.” 준석이 말했다. “두 시간이면 외부에서 한 코일 사오는 것보다 빠릅니다.” 수현은 고개를 저었다. “검사 결과가 안 좋으면 그때는 더 늦습니다.”
태성은 결정을 미루지 않았다. “검사는 바로 시작하고, 외부 한 코일도 확보합시다. 둘 중 하나가 남으면 다음 주문에 씁니다.” 재고담당 미선이 물었다. “그러면 단기적으로 재고가 늘어납니다.” “맞아요. 대신 라인 정지를 보험료라고 생각합시다.”
전환점
오후 한 시 반, 검사 결과 기존 코일은 사용 가능 판정을 받았다. 외부에서 산 한 코일은 결과적으로 당장 필요하지 않게 됐다. 재무팀에서 전화가 왔다. “왜 급매입했습니까? 114만원이면 마진이 거의 없습니다.” 태성이 설명했다. “두 시간 뒤 검사 결과를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라인을 세우는 비용과 비교했습니다.” “남은 코일은 어떻게 할 겁니까?” “다음 주 계약 물량에 우선 배정하고 신규 매입을 그만큼 줄이겠습니다.”
전환점은 오후 세 시에 찾아왔다. 철도운송 정상화 예상시간이 다시 미뤄졌다는 연락이었다. 태성은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아침의 긴급매입이 과잉 대응이 아니었던 셈이었다. 준석은 말했다. “오늘 산 코일이 내일은 비싸게 산 게 아닐 수도 있겠네요.” 태성이 답했다. “가격이 아니라 시간값을 산 거야.”
그날 최종 결정은 세 가지였다. 첫째, 철송 정상화 전까지 냉연도금재 재고를 전체 톤수가 아니라 고객별 가용규격 기준으로 관리한다. 둘째, GI와 HGI 긴급규격은 최소 안전재고를 새로 설정한다. 셋째, 긴급매입으로 늘어난 재고만큼 다음 정기매입을 줄여 현금부담을 상쇄한다. 영업팀은 일부 고객 납기를 재조정했고 생산팀은 라인 순서를 바꿨다. 품질팀은 검사 우선순위를 조정해 불확실한 재고를 빨리 판정하기로 했다.
저녁 일곱 시, 마지막 코일이 슬리터에 걸렸다. 밖에서는 화물차가 들어왔고 철길 쪽은 여전히 조용했다. 준석이 말했다. “오늘 1만원 비싸게 산 게 아깝긴 합니다.” 태성이 웃었다. “라인이 멈췄으면 1만원 얘기도 못 했어.” 냉연도금 시장은 수요가 약한데도 일부 규격은 물류 차질 때문에 더 비싸졌다. 그 모순 속에서 이들이 지킨 것은 가격이 아니라 납기와 신뢰였다.
다음 날부터 태성은 매일 아침 철송 도착시간과 고객별 가용재고를 함께 보게 했다. 이전에는 창고 전체 재고만 확인했지만 이제는 품목·두께·폭·표면등급별로 출하 가능 여부를 표시했다. 미선이 말했다. “숫자는 줄지 않았는데 빨간 칸이 더 많이 보이네요.” 태성이 답했다. “그게 진짜 부족분이야. 총재고가 많다는 이유로 안심했던 거지.”
영업팀 준석은 고객들에게 납기 우선순위를 직접 확인했다. 어떤 고객은 하루 늦어도 괜찮다고 했고, 어떤 고객은 한 시간 지연도 생산 차질로 이어진다고 했다. 그는 그 정보를 생산팀과 공유했다. 하나가 말했다. “이제 라인 순서를 고객 중요도 말고 실제 납기 위험으로 짤 수 있겠네요.” “영업도 무조건 오늘 출하만 외치지 않을게.” 준석이 답했다.
품질팀은 오래된 재고를 선제 검사하기 시작했다. 철송이 정상화되기 전까지 창고 안 재고가 회사의 유일한 완충장치였기 때문이다. 수현은 검사 대상에 우선순위를 매겼다. “긴급규격부터 검사하면 외부 긴급매입을 줄일 수 있습니다.” 태성은 승인했다. “검사도 재고관리의 일부로 보자.”
한편 시장가격은 품목별로 엇갈렸다. CR은 95~97만원, HGI와 EGI는 108~109만원, GI는 113~114만원 수준에서 거래됐고 일부는 전주보다 소폭 올랐다. 수요가 강해서라기보다 물류 차질과 재고 편차가 거래가격을 흔드는 모습이었다. 준석은 말했다. “고객은 왜 수요도 없는데 가격이 오르냐고 묻습니다.” 태성이 답했다. “수요가 약해도 필요한 규격이 제때 없으면 그 순간 그 규격은 비싸지는 거야.”
재무팀은 긴급매입 한도를 따로 만들었다. 단, 긴급매입을 하면 같은 수량만큼 다음 정기매입을 줄이는 조건을 붙였다. 이를 통해 현금이 계속 불어나는 것을 막았다. 태성은 이 규칙을 마음에 들어 했다. “긴급조달을 예외로 두면 예외가 습관이 돼. 반드시 다음 주문에서 상쇄하자.”
금요일 오후 철송 일부가 정상화됐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모두가 안도했지만 태성은 안전재고 기준을 원래대로 돌리지 않았다. “이번 사고가 끝났다고 다음 사고가 없는 건 아니야.” 그는 고객별 핵심규격에 최소재고 일수를 설정하고, 철도와 육송을 동시에 쓸 수 있는 대체 운송계획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일주일 동안 회사는 비싼 코일 하나를 더 샀고, 일부 고객과 납기를 조정했으며, 생산순서를 세 번 바꿨다. 표면적으로는 번거로운 한 주였다. 하지만 라인은 멈추지 않았고 주요 거래처의 클레임도 없었다. 철길이 막힌 날 회사가 배운 것은 재고량이 아니라 재고의 사용 가능성, 운송수단이 아니라 운송의 대체 가능성이었다.
다음 회의에서 태성은 물류 차질을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운영 리스크로 정의했다. 철도 의존도가 높은 규격은 육송 대체비용을 미리 계산하고, 수도권 창고에 최소 재고를 더 두기로 했다. 재무팀은 추가 재고에 반대했지만, 태성은 지난 일주일의 긴급 운송비와 라인 정지 위험을 보여줬다. 결국 품목별로 차등 안전재고를 적용하는 절충안이 나왔다.
영업팀도 고객에게 새로운 기준을 설명했다. 준석은 “모든 품목을 무조건 당일 납품하겠다는 약속보다, 어떤 규격을 언제까지 확실히 줄 수 있는지 말하겠다”고 했다. 고객 한 곳은 처음엔 불만을 표시했지만 실제 납기 가능시간을 정확히 받자 오히려 생산계획을 조정하기 쉬워졌다고 답했다.
가격은 다시 안정될 수 있고 철길도 다시 열릴 것이다. 그러나 태성은 이번 경험을 일회성으로 넘기지 않았다. 냉연도금재처럼 규격과 표면품질이 세분화된 제품은 총재고가 많아도 특정 순간에는 품절이 생긴다. 그는 주간회의 마지막에 말했다. “재고는 톤수가 아니라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시간으로 관리한다.” 그 문장이 이번 주의 가장 중요한 결론이 됐다.
태성은 창고 직원들과도 짧은 회의를 했다. 입고가 늦을 때마다 영업팀이 전화로 확인하는 방식 대신, 핵심 규격의 잔량과 예상 소진일을 매일 한 번 공유하도록 했다. 현장 직원이 먼저 위험을 알리면 사무실은 하루 일찍 대체운송이나 긴급매입을 준비할 수 있었다. 작은 정보의 선행이 비싼 긴급조달을 줄이는 가장 싼 보험이 되었다.
이 판단은 다음 주 첫 거래와 재고회전 결과를 다시 확인해 조정하기로 했다.
현장에서는 이 결정을 일주일짜리 임시대응이 아니라 반복 가능한 운영원칙으로 남기기로 했다. 다음 실행 때는 실제 판매속도와 회수일, 재고연령을 비교해 기준을 다시 조정한다.
그날의 가격
| 품목 | 가격 | 주간 변동 |
|---|---|---|
| 냉연강판(CR) | 95~97만원/톤 | 전주 대비 소폭 상승 |
| HGI·EGI | 108~109만원/톤 | 전주 대비 소폭 상승 |
| GI | 113~114만원/톤 | 전주 대비 소폭 상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