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작품은 실제 철강시장 자료를 모티프로 창작한 픽션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일부 기업·사건은 허구이며, 실제 기업·단체·사건과 관련이 없다. 실제 기업명은 공개된 시장정보와 가격정책을 설명하기 위한 범위에서만 사용했다.
부제: 열연
2026년 9월 둘째 주, 수도권 코일센터
이상신호
월요일 아침 여덟 시가 조금 넘었을 때 영업팀장 서진우의 휴대전화가 세 번 연속 울렸다. 첫 전화는 자동차 부품사 구매팀에서 온 가격 재협상 요청이었고, 두 번째는 인천 창고에서 들어온 수입 열연 입고 통보였으며, 세 번째는 재무팀에서 보낸 여신한도 경고 메시지였다. 세 가지 신호는 서로 다른 곳에서 왔지만 진우에게는 한 문장으로 들렸다. 지금 가격으로 팔면 손실이고, 버티면 재고가 늙는다.
그가 창고로 내려가자 출하반장 오경수가 코일 라벨을 확인하고 있었다. 국산 정품과 GS재, 수입재가 줄을 나눠 서 있었지만 멀리서 보면 모두 같은 검은 원통이었다. “정품은 오늘도 93에서 94를 얘기합니다.” 경수가 말했다. “GS는 91에서 92, 수입은 89까지 나옵니다. 거래처가 굳이 위를 볼 이유가 없겠죠.” 진우가 물었다. “89짜리가 실제로 얼마나 남았지?” “오늘 들어온 것까지 합치면 이번 주 출하분은 충분합니다. 다만 규격이 다 맞는 건 아닙니다.”
사무실로 올라오자 구매담당 차장 윤미정이 수입 오퍼표를 펼쳤다. 최근 환율이 낮아지고 해외 오퍼도 약해지면서 수입재의 체감 원가가 내려간다는 설명이었다. “문제는 가격만이 아닙니다. 전에 싸게 계약한 베트남산과 인도네시아산이 순차적으로 들어옵니다. 지금 국산을 많이 잡으면 10월에 장부가가 또 무거워집니다.” 진우가 말했다. “그러면 국산을 끊자는 얘기야?” “끊자는 게 아니라, 월 계약량을 줄이고 긴급규격만 가져가자는 얘기죠.”
조건의 충돌
오전 열한 시, 재무팀 과장 박선호가 회의실 문을 닫았다. “현재 A등급 거래처 세 곳이 한도를 거의 다 썼습니다. 월말 전에 매출채권 회수가 늦어지면 추가 출하를 막아야 합니다.” 진우가 눈썹을 찌푸렸다. “매출을 줄이면 재고가 남고, 출하를 늘리면 채권이 늘어난다. 둘 중 하나를 고르라는 거네.” 선호는 대답 대신 재고 에이징 표를 밀어놓았다. 60일을 넘긴 코일이 늘어 있었다. “이건 시간이 지나면 가격 문제가 아니라 금융비용 문제가 됩니다.”
그날 오후 진우는 가장 큰 거래처인 태림부품 구매팀장과 영상통화를 했다. 상대는 첫 마디부터 89만원을 꺼냈다. “수입재가 그 가격인데 국산 94를 받을 이유가 있습니까?” 진우가 말했다. “규격과 납기, 클레임 대응까지 같은 조건이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면 얼마까지 됩니까?” “단가만 보시면 답이 없습니다. 대신 이번 주 급한 규격은 기존 가격에서 일부 조정하고, 다음 달 물량은 분리 발주하시죠.” “결국 평균단가를 낮춰달라는 겁니다.” “평균단가는 낮추되, 저희가 손해를 확정하는 방식은 피하자는 겁니다.”
통화가 끝난 뒤 미정이 물었다. “가격을 더 내릴 생각이에요?” “아니. 물량을 나눌 거야.” 진우는 화이트보드에 세 줄을 적었다. 정품은 긴급 납기와 품질 민감 수요에만, GS재는 기존 거래처 방어용, 수입재는 가격 민감 수요에 제한 판매. “한 가격으로 시장을 이기려다간 셋 다 망가져. 재고 성격대로 팔자.”
전환점은 오후 네 시에 왔다. 물류팀에서 인천항 반입 일정이 하루 늦어진다는 연락이 왔다. 수입재가 싸더라도 당장 필요한 규격은 부족했다. 경수가 전화로 말했다. “내일 아침 납품 물량 중 3.2t 규격은 국산만 바로 나갑니다. 수입재 기다리면 거래처 라인이 멈출 수 있어요.” 진우는 곧바로 태림부품에 다시 전화했다. “내일 물량은 국산으로 갑니다. 단가는 94를 다 받지 않겠습니다. 대신 결제조건 60일을 45일로 당겨주십시오.” 구매팀장이 잠시 침묵했다. “단가 조정 폭은?” “납기 프리미엄과 결제조건을 묶어서 다시 드리겠습니다. 89만원과 단순 비교하는 거래는 하지 않겠습니다.”
전환점
재무팀 선호는 처음엔 반대했다. “매출총이익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진우가 답했다. “맞아. 그런데 60일짜리 외상을 45일로 줄이면 금융비용이 내려가. 그리고 60일 넘은 코일부터 털면 재고평가 손실도 줄어.” 미정도 계산기를 두드렸다. “신규 매입을 30% 줄이면 다음 달 평균재고도 떨어집니다.” 선호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 조건이면 승인선 올려보겠습니다.”
저녁 여섯 시, 출하장에는 다음 날 첫차 물량이 따로 모였다. 진우는 경수에게 말했다. “오래된 코일부터 묶되 품질 이력 확인해. 긴급규격은 정품으로 보내고, 가격 민감 물량은 수입재 도착 뒤로 넘겨.” 경수가 웃었다. “가격표보다 창고 지도가 먼저네요.” “이번 주는 그래야 살아남아.”
진우가 마지막으로 결재한 내용은 단순한 할인안이 아니었다. 국산 정품의 표면가격을 무너뜨리지 않는 대신 거래처별 납기와 결제조건, 재고 연령을 묶어 판매조건을 다시 설계했다. 신규 국산 매입량은 줄이고, 수입재는 규격별로 선별 판매하며, 60일 초과 재고를 우선 소진하기로 했다. 당장 매출총이익 몇 천원이 줄어드는 주문도 있었지만, 그 대가로 현금회전이 빨라지고 다음 달의 재고 손실 위험이 낮아졌다.
퇴근 직전 진우는 출하장에 다시 내려갔다. 멀리서 코일들이 트럭 위로 하나씩 올라가고 있었다. 89만원짜리 수입재가 시장의 기준점처럼 보였지만 실제 거래를 움직이는 것은 납기와 신용, 규격과 재고의 시간이었다. 그는 휴대전화 메모장에 한 줄을 적었다. 가격은 숫자 하나가 아니라 조건의 묶음이다. 다음 주 그 문장이 틀렸는지 맞았는지는 재고표가 말해줄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 진우는 전날의 결정을 실제 숫자로 다시 검증했다. 영업팀은 거래처별로 주문을 세 등급으로 나눴다. 가격을 최우선으로 보는 거래처, 납기를 우선하는 거래처, 품질과 클레임 대응을 중시하는 거래처였다. 같은 열연이라도 세 그룹이 받아들이는 가격은 달랐다. 미정이 말했다. “우리가 그동안 하나의 시세표로 너무 많은 거래를 설명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진우가 답했다. “시장가격은 하나여도 거래가격은 조건마다 달라. 이제 그걸 장부에 보이게 하자.”
창고에서는 오래된 코일의 표면 상태를 다시 확인했다. 경수는 두 코일에서 포장 손상을 발견하고 별도 구역으로 옮겼다. “이건 빨리 팔아도 클레임 나면 더 손해입니다.” 품질담당이 말했다. “재포장하고 사진 기록 남긴 뒤에 출하합시다.” 진우는 판매회의에서 그 조치를 공유했다. “에이징 재고라고 무조건 할인하지 마. 먼저 팔 수 있는 재고인지 확인해.” 할인 판매가 재고를 줄이는 가장 빠른 길처럼 보였지만, 품질사고 한 건이면 한 달의 마진이 날아갈 수 있었다.
재무팀은 새로운 조건표를 만들었다. 45일 결제 거래에는 일부 가격조정을 허용하고, 60일을 넘는 거래에는 추가 할인 승인을 금지했다. 선호가 말했다. “가격을 깎으면서 돈도 늦게 받는 거래가 제일 나쁩니다.” 진우가 웃었다. “그걸 이제야 규칙으로 쓰는군.” “예전엔 매출 목표가 먼저였죠.” “이번 달부터는 현금회전도 영업실적으로 보자.”
오후에는 신규 수입재 샘플을 두고 품질회의가 열렸다. 가공성 시험을 먼저 거치자는 의견과, 가격이 낮을 때 물량부터 확보하자는 의견이 맞섰다. 진우는 후자를 거절했다. “89만원이라는 숫자 때문에 검증 순서를 바꾸지 않는다. 한 코일 시험하고, 문제가 없으면 늘린다.” 미정도 동의했다. “환율이 내려갔다고 무조건 오늘이 최저가라고 볼 수도 없어요.”
이틀 뒤 태림부품에서 추가 주문이 왔다. 이번에는 납기가 일주일 여유 있었다. 진우는 즉시 수입재를 제안했다. 상대가 물었다. “지난번에는 국산을 권하더니 이번에는 왜 바뀌었습니까?” “지난번에는 시간이 없었고, 이번에는 시간이 있습니다. 같은 회사라도 주문 조건이 다르면 답이 달라집니다.” 그 설명은 의외로 쉽게 받아들여졌다.
주말을 앞두고 진우는 매출표보다 재고 회전표를 먼저 봤다. 매출은 계획보다 조금 낮았지만 60일 초과 재고가 줄었고, 외상매출금 회수 예정액은 늘었다. 표면적인 매출 성장보다 회사의 체력이 좋아진 셈이었다. 그는 회의에서 말했다. “이번 주 우리가 지킨 건 94만원이 아니다. 어떤 거래에는 국산을 쓰고 어떤 거래에는 수입을 쓰는 선택권을 지킨 거다.”
열연 시장은 여전히 약했다. 수입재가 낮은 가격으로 기준점을 만들고 국산 정품은 그 위에서 납기와 품질, 신뢰를 설명해야 했다. 그러나 진우는 이제 89만원이라는 숫자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가격이 모든 주문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며, 회사가 통제해야 할 것은 시장 전체가 아니라 자기 재고와 현금흐름, 거래조건이라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주말 전 마지막 점검에서 영업팀은 거래처별 손익을 다시 계산했다. 같은 93만원 판매라도 30일 결제와 75일 결제의 실질 마진은 달랐고, 긴급배차가 붙은 주문은 운송비가 수익을 깎았다. 진우는 표를 보며 “이제 매출액만 보고 잘 팔았다고 말하지 말자”고 했다. 선호도 동의했다. “채권 회수일과 재고일수를 함께 보면 손해인 거래가 꽤 보입니다.”
또 하나의 변화는 구매팀과 영업팀의 대화 방식이었다. 예전에는 구매가 싸게 사면 영업이 팔고, 영업이 못 팔면 구매 탓을 했다. 이번 주부터는 매입 전에 예상 출하처와 결제조건을 먼저 적었다. 미정이 말했다. “출구 없는 매입을 막자는 거죠.” 진우는 답했다. “맞아. 싸게 샀다는 말은 팔고 돈까지 받아야 완성되는 말이야.”
그날 오후 한 거래처가 다시 89만원 수입재를 기준으로 가격을 압박했다. 진우는 더 이상 방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 규격을 그 납기로 받을 수 있으면 그 제품을 사셔도 됩니다. 다만 내일 오전 라인 투입분은 저희가 보장할 수 있습니다.” 상대는 결국 국산 긴급물량과 수입 대기물량을 나눠 주문했다. 가격경쟁을 피한 것이 아니라, 경쟁의 기준을 가격 하나에서 납기와 신뢰까지 넓힌 결과였다.
그날의 가격
| 품목 | 가격 | 주간 변동 |
|---|---|---|
| 국산 열연 정품(SS275 시트) | 93~94만원/톤 | 원자료상 하락 흐름 |
| 수입대응재(GS) | 91~92만원/톤 | 원자료상 하락 흐름 |
| 수입 열연 | 89만원/톤 수준 | 원자료상 하락 흐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