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작품은 실제 철강시장 자료를 모티프로 창작한 픽션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일부 기업·사건은 허구이며, 실제 기업·단체·사건과 관련이 없다. 실제 기업명은 공개된 시장정보와 가격정책을 설명하기 위한 범위에서만 사용했다.
수도권의 한 H형강 유통창고에 첫 지게차가 들어온 것은 오전 6시 40분이었다. 야적장 안쪽에는 전날 절단을 끝낸 중소형 H형강이 출하 순서대로 놓여 있었지만, 영업팀장 민석의 시선은 제품이 아니라 휴대전화 화면에 붙어 있었다. 거래처 구매담당자가 새벽에 남긴 메시지는 짧았다. “오늘 오전까지 다시 견적 부탁합니다. 일본산 가격도 같이 보고 있습니다.”
민석은 창고 입구에서 물류반장 태준을 불렀다.
“어제 잡아둔 출하 순서 그대로 갈 수 있습니까?”
“물량은 됩니다. 그런데 오전 차 한 대가 빠졌습니다. 거래처 쪽에서 가격 확인하고 다시 연락 준답니다.”
“가격 때문에 차를 세웠다고요?”
“네. 요즘은 상차보다 전화가 먼저입니다.”
민석은 대답하지 않고 창고 안쪽으로 걸어갔다. 국산 중소형 H형강 유통가격은 톤당 116만~117만원 수준이었다. 지난주보다 한 차례 더 밀린 가격이었다. 그런데 시장에는 정반대 방향의 공지가 돌고 있었다. 동국제강이 17일 출하분부터 중소형 H형강 판매가격을 톤당 5만원 인상하겠다는 방침을 내놓은 것이다. 최근 유통가격을 감안하면 최소 121만원 수준을 겨냥한 인상이었다. 오늘은 그 경계선 바로 전날이었다.
문제는 시장이 인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느냐였다. 일본산 H형강은 톤당 104만원, 베트남산은 112만원 수준까지 내려와 있었다. 국산 가격이 밀리는 동안 수입재도 더 싸졌다. 게다가 철스크랩 구매가격은 추석 이후 추가 인하가 예고돼 있었다. 원료 쪽에서 가격을 밀어 올리는 힘보다 끌어내리는 신호가 더 선명해 보였다.
작년 가을의 빈 랙
민석은 절단기 옆에 멈춰 섰다가 문득 지난해 가을을 떠올렸다. 그때도 메이커가 가격을 올리겠다고 나섰고, 유통업체들은 “이번에는 다르다”며 선매입에 들어갔다. 민석이 일하던 회사도 빈 랙을 채우느라 매입을 서둘렀다. 그러나 실제 수요가 따라오지 않았다. 며칠 뒤 경쟁업체가 재고를 현금화하려고 가격을 낮추면서 인상분은 시장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때 재무팀 과장이 민석에게 했던 말이 아직 남아 있었다.
“가격이 오른다는 말과 돈이 돌아온다는 말은 다릅니다.”
당시 민석은 반박했다.
“재고가 없으면 오를 때 못 팝니다.”
재무팀 과장은 손익표를 접으며 말했다.
“재고가 많으면 내릴 때 더 오래 못 팝니다.”
그 말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 채 한 계절이 지나갔다. 가격보다 먼저 회사의 현금이 묶였고, 영업팀은 매출을 만들기 위해 다시 할인에 들어갔다. 민석에게 가격 인상 공지는 이후부터 ‘얼마나 오르나’보다 ‘누가 실제로 그 가격에 사나’를 먼저 묻게 만드는 문서가 됐다.
현재로 돌아오자 구매담당자 지현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아침부터 세 군데 공급처의 조건을 비교하고 있었다.
“메이커 인상 공지는 확인했죠?” 민석이 물었다.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시중가격은 아직 116에서 117입니다. 수입재는 더 낮고요.”
“오늘 더 사두는 게 맞습니까?”
지현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매입가격이 실제로 올라가는지 먼저 봐야 합니다. 공지 때문에 선매입하면 지난해랑 똑같아질 수 있습니다.”
“그럼 재고를 비워두자는 겁니까?”
“비우자는 게 아니라, 가격이 아니라 회전으로 판단하자는 겁니다.”
그 순간 전화가 울렸다. 새벽에 메시지를 남긴 거래처였다. 민석은 스피커를 켜지 않고 통화했지만, 상대방의 요구는 사무실에 있는 모두가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명확했다. 국산을 계속 쓰고 싶지만 가격 차이가 너무 크고, 17일 이후 가격이 오르면 수입재 검토를 본격화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통화를 끝낸 뒤 영업사원 준호가 물었다.
“117에 오늘 확정하면 잡을 수 있을까요?”
“잡는다는 게 주문을 말하는 거야, 거래처를 말하는 거야?” 민석이 되물었다.
준호가 잠시 멈췄다.
“둘 다입니다.”
“그럼 116 밑으로 내려서 잡으면?”
“주문은 잡아도 가격은 무너집니다.”
“121을 바로 부르면?”
“가격은 지켜도 거래처가 빠질 수 있습니다.”
회의실이 아니라 창고 옆 사무실에서 세 사람의 계산이 맞부딪쳤다. 영업은 거래처를 놓치고 싶지 않았고, 구매는 인상 공지만 믿고 재고를 늘리는 일을 피하고 싶었다. 물류는 출하차량이 빈 채 돌아가는 것을 싫어했다. 같은 H형강을 보고 있었지만 손익을 보는 위치가 달랐다.
17일을 앞둔 오후
오전 11시가 지나자 시장에서 들려오는 말은 더 복잡해졌다. “가격을 올린다”는 말과 “아직 117에도 거래가 어렵다”는 말이 동시에 돌았다. 민석은 지난해처럼 둘 중 하나를 진실로 고르려 하지 않았다. 대신 어떤 가격이 실제 계약으로 이어지는지 보기로 했다.
그는 거래처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오늘 국산은 현재 시장선에서 제안하겠습니다. 다만 17일 이후에는 메이커 매입조건이 실제로 바뀌는지 확인하고 다시 협의하겠습니다.”
상대가 물었다.
“그러면 오늘 가격을 다음 주까지 보장해 줄 수 있습니까?”
“그건 어렵습니다. 대신 오늘 확정분은 오늘 조건으로 책임지겠습니다.”
“수입재보다 차이가 큽니다.”
“그 차이는 압니다. 그래서 국산 가격을 121만원으로 먼저 올려 부르지도 않겠습니다. 반대로 수입재를 따라가려고 시장 아래로 던지지도 않겠습니다.”
상대는 다시 가격만 묻지 않았다. 수입재로 바꿀 경우 현장 승인과 자재 서류를 다시 확인해야 하고, 이미 잡힌 절단·상차 순서도 손봐야 한다고 했다. 가격표 한 줄만 보면 수입재가 유리했지만, 실제 구매결정에는 납기와 승인, 현장 일정이 함께 들어왔다. 민석은 그 틈을 국산 가격을 높이는 명분으로 쓰지 않았다. 대신 거래처가 무엇을 포기해야 수입재로 넘어갈 수 있는지를 확인했다.
“국산을 유지한다면 우리가 책임져야 할 건 뭡니까?” 민석이 물었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약속한 날에 들어오는 겁니다. 현장에서 다시 자재 승인 올리는 것도 번거롭고요.”
“그럼 오늘 필요한 출하부터 확정하고, 이후 물량은 17일 시장 확인 뒤 다시 보시죠.”
“메이커가 올렸다고 바로 5만원 올리는 건 아니죠?”
“실제 매입조건과 시중 거래가 같이 움직이는지 확인하겠습니다. 공지만으로 거래처에 먼저 청구하지는 않겠습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거래처는 당장 전량을 확정하지 않고 필요한 출하분부터 진행하겠다고 답했다. 민석이 원한 대답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난해처럼 가격을 방어하려고 재고를 늘리거나, 매출을 만들기 위해 가격을 먼저 무너뜨리는 선택도 아니었다.
오후에 재무팀장이 창고로 내려왔다.
“결론 났습니까?”
민석이 말했다.
“17일 인상분을 오늘 재고에 미리 얹지 않겠습니다. 그렇다고 116만원 아래 할인도 하지 않겠습니다. 신규 매입은 실제 매입가격이 바뀌는 걸 확인한 뒤 결정하고, 기존 거래처에는 당일 확정 조건만 주겠습니다.”
“매출이 줄 수 있습니다.”
“압니다.”
“그럼 왜 그렇게 갑니까?”
민석은 창고 밖으로 나가는 지게차를 바라봤다.
“이번에는 가격표보다 회전 속도를 먼저 보려고 합니다. 인상이 시장에 먹히면 그때 따라가면 됩니다. 안 먹히면 재고가 우리보다 먼저 답을 줄 겁니다.”
그날 오후 출하차량은 평소보다 한 대 적게 움직였다. 영업팀 입장에서는 놓친 매출이었다. 하지만 구매팀 장부에는 추가 선매입이 잡히지 않았다. 가격 인상 전날인데도 창고는 재고를 늘리지 않았다. 누군가는 기회를 놓쳤다고 말했고, 누군가는 손실을 피했다고 말했다.
민석은 퇴근 전에 오전에 받은 첫 견적서를 다시 출력해 절단기 옆 게시판에 꽂아두었다. 그 옆에는 17일 이후 다시 검토할 두 번째 견적서가 놓였다. 두 장의 종이 사이에는 불과 하루가 있었지만, 그 하루 동안 확인해야 할 것은 5만원의 인상폭이 아니라 실제 시장이 그 가격을 받아들이는지 여부였다.
H형강 시장은 여전히 약했다. 국산은 116만~117만원, 일본산은 104만원, 베트남산은 112만원 수준이었다. 동국제강의 인상 시도는 분명한 신호였지만, 철스크랩 추가 인하와 짧은 영업일수, 수요 부진은 반대편에서 가격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민석은 그 어느 쪽도 미리 승자로 정하지 않았다. 다음 날 그가 확인하려는 것은 공지가 아니라 첫 실제 거래였다.
그날의 가격
| 품목 | 가격 | 주간 변동 |
|---|---|---|
| 일본산 H형강 | 104만원/톤 | 전주 대비 2만원 하락 |
| 베트남산 H형강 | 112만원/톤 | 전주 대비 1만원 하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