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작품은 실제 철강시장 자료를 모티프로 창작한 픽션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일부 기업·사건은 허구이며, 실제 기업·단체·사건과 관련이 없다. 실제 기업명은 공개된 시장정보와 가격정책을 설명하기 위한 범위에서만 사용했다.
오전 여덟 시가 조금 넘자 구매팀장 윤태호는 전날 저장해 둔 매입 비교표를 다시 열었다. 국산 열연강판은 톤당 90만~92만 원, 수입산은 87만~89만 원. 숫자만 놓고 보면 답은 단순했다. 싸게 살 수 있는 쪽을 더 사면 됐다. 그런데 윤 팀장은 표의 맨 오른쪽에 있는 납기 칸에서 손을 멈췄다. 10월 중순, 11월 중순, 그리고 아직 선적일이 확정되지 않은 물량. 같은 열연이라도 창고에 도착하는 날짜가 다르면 회사의 손익은 달라졌다.
“중국산 오퍼 다시 들어온 거 있습니까?”
무역 담당 김대리는 노트북을 돌려 보였다. “4분기 선적분이 550달러 초반입니다. 지난달보다 부담이 조금 내려왔습니다.”
“동남아 물량은요?”
“베트남은 10월 중순 도착분이 535달러, 11월 중순 도착분이 545달러 수준으로 잡혀 있습니다. 인도네시아도 10월 도착분이 530달러대 계약 사례가 있습니다.”
윤 팀장은 가격보다 날짜를 먼저 읽었다. “그러면 지금 싸다는 이유로 더 잡으면, 실제 입고 시점에는 창고가 어떻게 됩니까?”
김대리는 대답하지 않고 재고관리 화면을 띄웠다. 이미 입항했거나 통관을 기다리는 수입재가 있었고, 다음 달 들어올 물량도 줄지 않았다. 9월 1~20일 열연 수입량은 15만7,623톤. 전년 같은 기간보다 두 배가 넘는 수준이었다. 일본산 8만5,886톤, 중국산 3만1,353톤에 대만·인도네시아·베트남산까지 겹쳐 있었다. 싸게 계약한 코일이 한꺼번에 들어오는 달에는 가격 경쟁보다 공간과 현금이 먼저 부족해질 수 있었다.
싼 가격의 출처를 따라가다
윤 팀장은 구매가격 차이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다시 확인하기로 했다. 영업팀 이과장을 불렀다.
“지난주에 국산 정품 얼마까지 팔았죠?”
“90만 원 초반입니다. 수입대응재는 90만 원 안팎이고요. 수입산은 그보다 낮았습니다.”
“그 가격에 물량은 움직였습니까?”
이과장은 잠시 웃었다. “가격이 낮다고 주문이 늘지는 않았습니다. 건설 쪽도 그렇고 가공 수요도 필요한 만큼만 삽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사는 이유는 싸서입니까, 곧 오를 것 같아서입니까?”
“둘 다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제조사는 원가 때문에 올리고 싶어 하지만 유통은 아직 못 따라갑니다.”
그 말이 문제의 중심이었다. 유통가격은 약했고 제조원가는 반대로 올라가고 있었다. 9월 제선원가는 톤당 335달러 수준까지 높아졌고, 원료탄 가격은 최근 한 달 사이 15% 넘게 상승했다. 해외 철강사들도 판재류 인상을 잇달아 시도했고 국내에서도 10월 가격 인상 움직임이 나타났다. 가격표만 보면 수입산이 유리했지만, 원가 흐름만 보면 국산 가격이 계속 내려갈 것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려웠다.
재무팀 박차장이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매입 확대 검토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윤 팀장이 의자를 밀어줬다. “수입재가 싸긴 합니다.”
박차장은 바로 물었다. “언제 들어옵니까?”
김대리가 답했다. “10월과 11월에 나눠 들어옵니다.”
“그럼 결제는 먼저 나가고 판매는 나중일 수도 있겠네요.”
“맞습니다.”
박차장이 비교표 아래쪽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톤당 몇 만 원 싸게 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몇 주 동안 돈이 재고로 묶이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지금 회전이 빠른 것도 아니잖습니까.”
윤 팀장은 처음 표를 열었을 때보다 질문이 하나 늘었다. ‘얼마에 사는가’가 아니라 ‘언제 돈으로 돌아오는가’였다.
코일 한 장보다 먼저 본 것
점심 뒤 윤 팀장은 물류팀장 최성민과 창고로 내려갔다. 크레인 아래에는 국산과 수입 열연코일이 구역을 나눠 놓여 있었다. 최 팀장은 다음 주 입고 예정표를 보여줬다.
“지금도 여유가 아주 많지는 않습니다. 물량이 겹치면 일부는 외부 창고로 빼야 합니다.”
“외부 창고로 가면?”
“상하차가 한 번 더 붙고, 출고 대응도 느려집니다.”
윤 팀장은 코일의 표면보다 바닥의 빈 자리를 봤다. “이번에 추가 계약하면 몇 주 뒤부터 부담이 옵니까?”
“10월 중순 물량부터 겹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11월 물량까지 들어오면 판매 속도가 중요해집니다.”
“영업에서 빠져나갈 물량을 확정하지 못하면?”
“싸게 산 재고가 오래 남는 겁니다.”
마침 영업팀에서 전화가 왔다. 자동차 부품 가공업체가 다음 달 사용 물량을 문의했지만, 전량 확정 발주는 아니었다. 수요가는 가격을 더 보고 싶어 했다. 윤 팀장은 통화를 넘겨받았다.
“물량을 미리 잡아드릴까요?”
상대방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가격이 더 내려갈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윤 팀장이 말했다. “수입재는 낮은 가격이 계속 보이지만, 제조원가는 반대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필요한 규격과 납기부터 확정해주시면 그 범위에서 맞추겠습니다.”
“그러면 전량 말고 우선 필요한 것만 잡죠.”
“그게 낫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뒤 윤 팀장은 최 팀장에게 말했다. “고객도 재고를 우리 창고에 대신 쌓아두고 싶은 겁니다.”
최 팀장이 웃었다. “우리도 수입업체 창고에 그렇게 하고 싶은 거고요.”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싼 가격은 늘 누군가의 창고와 누군가의 자금을 필요로 했다.
가격표에 없는 세 가지
창고에서 돌아오는 길에 윤 팀장은 품질관리 책임자 오현수를 불렀다. 최근 들어오는 수입 열연의 가격 차이가 커지면서 영업팀이 고객별로 적용 가능한 소재를 다시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 책임자는 코일별 검사기록을 펼쳐놓고 말했다.
“가격이 낮은 물량도 규격과 용도에 따라 바로 대체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고객 승인 이력이 있는 소재인지, 표면 요구가 어느 정도인지, 절단 뒤 문제가 없는지부터 봐야 합니다.”
윤 팀장이 물었다. “이번에 들어오는 물량은 판매처가 정해져 있습니까?”
“일부만요. 나머지는 범용 규격이지만 실제로는 고객마다 선호가 다릅니다.”
“그러면 계약할 때는 범용재인데, 들어오고 나면 전용재처럼 묶일 수도 있겠네요.”
“그렇습니다. 가격은 시장 전체 숫자인데 재고는 고객별 숫자가 됩니다.”
윤 팀장은 그 말을 수첩에 적었다. 가격표에는 나타나지 않는 세 가지가 있었다. 고객 승인, 창고 자리, 그리고 현금이 돌아오는 시점이었다. 어느 하나라도 어긋나면 톤당 몇 만 원의 매입 차이는 쉽게 사라졌다. 그는 9월 수입 통계를 다시 들여다봤다. 20일까지 일본산만 8만5,886톤이 들어왔고 중국산은 3만1,353톤, 대만산은 2만225톤이었다.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물량도 이미 1만9,806톤에 달했다. 숫자는 특정 업체의 재고를 뜻하지 않았지만, 시장 전체의 선택지가 빠르게 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오 책임자가 물었다. “그래도 가격이 더 내려가면 지금 안 산 게 손해 아닙니까?”
윤 팀장은 잠시 생각했다. “그럴 수 있습니다. 반대로 원가 인상이 반영되면 지금 사는 게 맞았다고 할 수도 있고요. 그런데 우리는 방향을 맞히는 회사가 아니라 재고를 돌리는 회사입니다.”
“그러면 기준을 뭘로 잡습니까?”
“고객이 언제 가져가는지, 그 날짜를 기준으로 잡아야죠.”
그는 구매팀에 새 지시를 보냈다. 앞으로 수입 열연 비교표에는 오퍼가격과 환산원가만 적지 말고, 예상 입항일과 통관 후 창고 반입일, 고객 승인 여부, 예상 출고월을 함께 적도록 했다. 더 싼 코일을 찾는 표가 아니라, 회사가 실제로 소화할 수 있는 코일을 찾는 표로 바꾸자는 뜻이었다.
매입표의 마지막 칸
오후 네 시, 윤 팀장은 구매회의를 다시 열었다. 그는 추가 수입계약을 전면 보류하지도, 반대로 가격만 보고 확대하지도 않았다. 10월 중순 도착분은 확정 판매가 가능한 규격을 중심으로 검토하고, 11월 물량은 영업팀의 실수요 확인 전까지 신규 매입을 늘리지 않기로 했다. 동시에 국산 열연은 제조사의 10월 가격 인상 가능성을 감안해 필요한 규격의 최소 재고를 유지하기로 했다.
김대리가 물었다. “결국 수입재를 안 사는 겁니까?”
윤 팀장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싼 물량을 사는 게 아니라, 팔 수 있는 날짜가 보이는 물량을 삽니다.”
박차장이 덧붙였다. “그럼 자금계획도 입고일이 아니라 출고 가능일 기준으로 다시 잡겠습니다.”
영업팀 이과장은 메모를 하며 말했다. “이번 주에는 고객별 납기 확정부터 받겠습니다. 가격만 묻는 주문은 뒤로 미루고요.”
회의가 끝난 뒤 윤 팀장은 처음 열었던 비교표로 돌아갔다. 국산 90만~92만 원, 수입산 87만~89만 원. 세 시간 전과 숫자는 같았다. 달라진 것은 마지막 칸이었다. 그는 ‘가격’ 옆에 ‘판매 가능한 날짜’라는 항목을 하나 추가했다.
시장은 여전히 어느 쪽으로도 명확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수입 열연은 계속 들어오고 있었고, 4분기 계약 물량도 대기 중이었다. 반면 원료탄과 제선원가 상승은 제조사의 인상 압력을 키우고 있었다. 윤 팀장은 그 두 흐름 가운데서 가격 방향을 맞히려 하지 않았다. 대신 회사가 감당할 수 있는 시간의 길이를 정했다.
그날 구매팀이 멈춘 것은 매입 자체가 아니었다. 가격이 싸다는 이유만으로 납기를 무시하던 방식이었다.
그날의 가격
| 품목 | 가격 | 주간 변동 |
|---|---|---|
| 국산 열연강판(GS강종, SS275 3mm SHEET 수도권 1차) | 톤당 90만~92만 원 | 1만 원 하락 |
| 수입 열연강판(GS강종, SS275 3mm SHEET 수도권 1차) | 톤당 87만~89만 원 | 1만 원 하락 |
| 중국 천진항 열연코일(SS400 3mm) | 톤당 490~496달러 FOB | 중심가격 8달러 하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