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9월 29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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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계절 ㊿ — 도금재가 바뀌어도 승인은 남았다

냉연도금 코일 야드에서 작업자들이 코일 출하와 품질 확인을 진행하는 철강 유통 현장
이 작품은 실제 철강시장 자료를 모티프로 창작한 픽션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일부 기업·사건은 허구이며, 실제 기업·단체·사건과 관련이 없다. 실제 기업명은 공개된 시장정보와 가격정책을 설명하기 위한 범위에서만 사용했다.


연휴가 끝난 첫 아침, 가공센터의 슬리팅 라인은 평소보다 늦게 움직였다. 입구 쪽에 세워진 코일 하나가 작업순서표에서 갑자기 빠졌기 때문이다. 생산반장 최민석은 코일 표면을 한 번, 작업지시서를 한 번 더 확인했다. 품질팀 대리 윤서진이 코일 옆에서 손을 들었다.


“이 코일은 바로 투입하면 안 됩니다.”

민석이 고개를 들었다. “폭하고 두께는 주문서대로인데요?”

“치수 문제가 아닙니다. 소재 계열이 달라요. 기존에 쓰던 냉연 도금재가 아니라 열연 소재 도금재입니다.”


라인 뒤편에서는 다음 코일을 기다리는 크레인이 멈춰 있었다. 생산 일정만 놓고 보면 몇 분 안에 결론을 내야 했다. 그러나 서진은 코일에 붙은 내부 확인표를 떼지 않았다. 구매팀이 새로 들여온 중국산 HGI 시험물량이었다. 중국산 냉연 도금재에 잠정 반덤핑관세가 붙은 뒤 상대적으로 규제 부담이 적은 열연 소재 도금재가 시장에 늘고 있다는 이야기는 이미 회의에서 여러 번 나왔다. 문제는 시장에서 살 수 있다는 것과 고객 제품에 바로 쓸 수 있다는 것이 같은 뜻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멈춘 라인보다 먼저 확인해야 할 것

구매팀장 박도현이 현장으로 내려왔다. 그는 코일 앞에서 작업지시서를 받아 들고 물었다.

“품질팀에서 본 차이는 뭡니까?”


서진이 답했다. “표면처리 자체만 보면 비슷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냉연 소재와 열연 소재는 바탕재가 다릅니다. 고객 승인서에 냉연 도금재로 묶여 있는 품목이면 우리가 임의로 바꿀 수 없습니다.”

“시장에서는 대체 가능하다는 얘기가 많잖아요.”


“대체 가능한 용도가 있다는 얘기지, 모든 주문에 그대로 쓸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생산반장 민석이 끼어들었다. “오늘 이 코일을 빼면 뒤에 잡힌 절단 순서도 다시 맞춰야 합니다. 크레인 이동도 한 번 더 해야 하고요.”


도현은 잠시 말이 없었다. 최근 도금재 시장은 구매팀 입장에서 매력과 불안을 동시에 주고 있었다. 국산 아연도금강판 유통가격은 톤당 112만~114만원, 수입재는 107만~109만원 수준에서 보합을 유지했다. 같은 주 냉연강판은 국산 97만~99만원, 수입재 93만~95만원으로 각각 1만원 올랐다. 가격표만 보면 원가를 낮출 방법을 찾아야 할 이유가 분명했다. 하지만 가격이 낮은 소재를 확보해 놓고도 고객 승인을 받지 못하면 재고는 더 오래 창고에 남는다.


도현이 말했다. “일단 이 코일은 보류합시다. 대신 어디까지 대체 가능한지 오늘 안에 구분해 주세요.”

서진이 바로 되물었다. “용도별로 나눠야 합니다. 일반 구조용으로 승인 여지가 있는 고객과 외관·성형 조건이 까다로운 고객을 같은 표에 넣으면 안 됩니다.”

“영업팀도 같이 보죠.”


가격표 밖에 있는 승인 시간

오전 회의에는 영업팀 과장 이재훈과 자금담당 차장 한소라까지 들어왔다. 회의실 화면에는 두 가지 숫자만 크게 적혀 있었다. 도금재 유통가격과 냉연 유통가격이었다. 그 옆에는 숫자가 없는 칸이 하나 더 있었다. ‘승인 여부’였다.

재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고객들이 요즘 가격에는 예민합니다. 수입재가 싸면 왜 못 쓰느냐고 바로 묻습니다.”


서진이 말했다. “그 질문에는 제품별로 답해야 합니다. 열연 도금재가 충분한 품질을 내는 용도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존 승인조건이 냉연 소재를 전제로 만들어진 주문은 샘플 평가나 변경승인 없이 넘어가면 안 됩니다.”

자금담당 한소라가 도현을 보며 물었다. “구매단가만 낮고 승인에 시간이 걸리면 재고자금은 더 묶입니다. 지금 우리가 필요한 건 싼 재고입니까, 빨리 나가는 재고입니까?”


도현은 대답 대신 영업팀에 물었다. “현재 주문 중에서 소재 변경을 고객과 협의할 수 있는 건 어느 쪽입니까?”

재훈이 주문 목록을 넘겼다. “가격 민감도가 높은 일반재 고객은 협의 여지가 있습니다. 반대로 기존 공급승인과 동일 소재를 요구하는 곳은 건드리지 않는 게 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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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두 그룹으로 나눕시다.”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험재는 별도 표찰로 관리하고, 고객별 승인 전에는 정규 생산에 섞지 않겠습니다.”

민석은 생산 일정표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오늘 라인은 다시 짜야겠네요.”

도현이 말했다. “한 번 다시 짜는 게 나중에 전량 다시 만드는 것보다 낫습니다.”


그 말에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구매팀은 가격 차이를 보고 움직였지만 생산팀은 시간으로 계산했고, 품질팀은 클레임 가능성으로 계산했다. 영업팀은 고객이 받아들일 수 있는 변경의 폭을 계산했다. 같은 코일 하나를 두고 네 부서가 전혀 다른 원가를 보고 있었다.


출하되는 코일과 남는 코일

오후에는 고객사 구매담당자에게 전화가 이어졌다. 재훈은 한 고객에게 소재 변경 가능성을 설명한 뒤 통화를 스피커로 돌렸다.

“가격 조건이 좋아지는 건 이해합니다. 다만 기존 납품품과 소재가 달라지면 먼저 샘플을 봐야 합니다.” 고객 담당자가 말했다.

재훈이 답했다. “정규 납품 전에 별도 샘플로 확인하겠습니다. 승인 전 물량은 기존 사양으로 공급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세요. 가격 때문에 현장에서 다시 문제 생기는 게 더 비쌉니다.”

통화가 끝난 뒤 도현이 웃지 않은 채 말했다. “저 말이 답이네요. 싼 가격이 항상 낮은 원가는 아니라는 것.”


서진은 시험코일에 별도 관리표를 붙였다. 일반용도 가운데 고객 협의가 가능한 주문만 후보로 남기고, 기존 승인조건이 명확한 주문에는 국산과 기존 수입 GI를 그대로 배정했다. 생산팀은 크레인 동선을 다시 짰고, 한 차례 들어 올렸던 코일을 다른 자리로 옮겼다. 추가 하역과 대기시간은 비용이었다. 그러나 승인되지 않은 소재를 투입한 뒤 생길 수 있는 반품, 재작업, 납기 지연보다는 작은 비용이었다.


해가 기울 무렵 첫 출하차가 문을 나갔다. 오전에 멈춰 섰던 시험코일은 그대로 야드에 남아 있었다. 도현은 출하장을 보다가 한소라에게 말했다.

“오늘은 새 코일을 못 팔았네요.”


한소라가 답했다. “아니요. 오늘은 팔 수 있는 재고와 아직 팔면 안 되는 재고를 구분한 겁니다. 그 차이를 모르고 있으면 현금이 더 오래 묶입니다.”

도현은 다시 코일 쪽을 바라봤다. 시장에서는 규제가 바뀌자 곧바로 새로운 도금재가 들어오고 있었다. 제품은 빨리 바뀌었지만 거래의 기준은 그렇게 빨리 바뀌지 않았다. 가격표는 하루에도 움직일 수 있었지만 품질승인과 고객의 신뢰는 시간을 요구했다. 그날 구매팀이 내린 결정은 가장 싼 코일을 고르는 일이 아니라, 어떤 코일을 어느 고객에게 팔 수 있는지를 먼저 정하는 일이었다.


창고 불이 하나씩 꺼질 때까지 시험코일은 지정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 하루의 정지는 다음 거래를 지키기 위한 비용이었다.


도현은 야드 장부에 새 칸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품목명만으로 재고를 묶던 방식에서 벗어나 고객 승인 여부와 적용 가능한 용도를 함께 표시하도록 했다. 냉연 도금재와 열연 소재 도금재를 같은 ‘도금 코일’로만 보면 구매단가 차이는 보이지만, 실제로 어느 주문에 투입할 수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창고에서는 같은 무게의 코일이라도 출하 가능성이 다르면 전혀 다른 재고였다.


한소라는 그 구분을 자금회의에도 그대로 가져가겠다고 했다. “승인 대기 재고는 판매 가능 재고와 따로 봐야 합니다. 그래야 구매가 싸게 잘했다는 평가도, 영업이 못 팔았다는 평가도 성급하게 하지 않게 됩니다.”


도현이 대답했다. “앞으로 신규 수입재는 계약 전에 품질팀과 영업팀이 먼저 적용처를 확인합시다. 가격을 본 다음에 승인처를 찾는 순서를 바꾸죠.”

재훈은 그 결정을 메모했다. 반덤핑 조치가 특정 제품의 수입 조건을 바꾸면 시장은 곧바로 다른 길을 찾는다. 중국산 냉연 도금재에 최고 33.67%의 잠정관세가 부과된 뒤 HGI가 대안으로 떠오른 것도 그런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공급경로가 생겼다는 사실과 그 소재가 기존 고객의 품질 기준을 자동으로 통과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유통업체가 얻을 수 있는 가격 기회는 분명했지만, 그 기회를 실제 매출로 바꾸려면 품질·생산·영업의 승인 시간이 함께 계산돼야 했다.


그날의 가격

품목가격주간 변동
냉연강판 국내산97만~99만원/톤1만원 상승
냉연강판 수입산93만~95만원/톤1만원 상승
아연도금강판(GI) 국내산112만~114만원/톤보합
아연도금강판(GI) 수입산107만~109만원/톤보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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